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는 어떻게 얻을까
1991년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 수장인 카를 오토 푈 총재가 4년의 잔여 임기를 앞둔 채 사임했다. 관가나 언론에서는 12년째 중앙은행을 이끌었던 그가 사임한 실질적 원인으로 당시 독일 수상 헬무트 콜과의 불화를 지적했다. 10년간 함께 손발을 맞춰온 두 지도자의 갈등은 동・서독 경제통합의 방법에 대한 이견으로 시작됐다. 푈 총재는 독일 통화정책 책임자로서 동・서독 간 통화통합에 대해 콜 수상과 몇 가지 점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첫째, 화폐 통합의 시점을 늦춰야 한다. 생산성의 차이가 일정 수준 수렴한 후에 통합해야 경제적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화폐의 교환 비율이 생산성의 차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4.4(동독 화폐) 대 1(서독 화폐)로 정해야 한다. 셋째, 재정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세금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콜 수상이 동독 국민에게는 서독 화폐로 환심을 사고 서독 국민에게는 통일의 혜택만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동·서독 간 화폐통합은 정치 통합보다 3개월 앞선 1990년 7월 1일 단행됐다. 화폐 교환 비율은 평균 1.83 대 1, 임금 교환 비율은 1 대 1로 통화 통합이 이뤄졌다. 결과는 푈 총재의 예상대로였다. 1990년 말까지 동독 지역 기업 40%가 도산했다. 화폐 공급이 늘어나 1988년 1.3%이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6%로 올랐고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통화로 인정받던 독일 마르크화 가치는 미국 달러 대비 17% 급락했다. 푈 총재는 통화량을 흡수하고 마르크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자율을 인상했다. 기준금리 격인 롬바르드 금리는 6%에서 8%로 상승했다. 독일 통화가치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이자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서독 지역 중소기업들까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콜 수상은 중앙은행의 이자율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압박했다. 푈 총재는 물가 안정과 통화가치를 지키는 것이 분데스방크의 법적 의무라고 맞섰다. 정부의 압력이 거세지자, 그는 정책을 수정하는 대신 4년이나 남은 중앙은행 총재직을 사임했다. 푈 총재 사임 후 독일 마르크화는 오히려 가치가 상승했다. 분데스방크의 통화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높아진 탓이다.
독일은 1920년 초 사상 최악의 초인플레이션(한 달 사이 물가가 50% 이상 상승하는 것)을 경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배상금을 승전국들에 지불하기 위해 화폐 증발 정책을 선택한 것이 문제를 촉발했다. 1921년 6월부터 1924년 1월까지 물가는 10억 배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 달러 대비 독일 마르크화 환율은 60마르크에서 4조2000억마르크로 급등했다. 기업들은 도산하고 시장은 마비됐다. 중산층이 몰락했고 국민 생활은 자급자족과 물물 거래를 기반으로 전환됐다. 1924년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물가 안정을 최고의 정책 목표로 설정하면서 인플레이션은 정상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물가 안정에 대한 통화정책 기조와 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은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됐다.
지난 6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제롬 파월 의장이 향후 두 번 정도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이 하락세를 보였다. 파월 의장은 물가 상승세가 둔화하고는 있지만 아직 소비자물가지수가 목표치인 2%보다 훨씬 높은 4% 수준이어서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 연준은 물가, 성장률, 실업률을 통화정책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발발한 2020년처럼 심각한 경제적 충격이 없는 한 물가 목표가 통화정책 결정의 우선 기준이다. 물가 상승이 임금 상승과 추가 물가 상승이라는 악순환을 불러올 뿐 아니라 소비자의 실질소득 감소로 성장 기반을 약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지난 1월 이후 3.5%의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다시 상승하고 생활 물가도 오르고 있다. 물가와 경기, 환율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소국 개방경제의 통화정책 결정은 선진국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시장의 장기적인 신뢰를 얻으려면 공교한 기술적 결정 능력보다는 독일 분데스방크처럼 확실한 정책 철학이 더 중요하다. 정책에 대한 신뢰는 오래가는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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