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향의 스타일노트 <35>] 선택의 자유가 만든 젠더 플루이드…성별 무경계 패션의 미학
파리 중심부에 있는 에콜 밀리테르(Ecole Militaire)의 코트야드에서 진행된 디올의 2024년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 정사각형 패턴의 쇼장 바닥에 숨겨진 트랩 도어가 열리면서 모델들이 등장하며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징 오프닝을 선사했다. 이 스펙터클한 이벤트는 영국계 디자이너 킴 존스가 디올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활약한 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이번 컬렉션은 남성복과 여성복의 복합적인 조화였다. 영국 남성복의 고급 테일러링 전통을 오트 쿠튀르 소재와 결합하여 디올의 여성복을 연상시키게 했다. 킴 존스는 “오트 쿠튀르 하우스인 디올로부터 상속받은 여성복을 남성복에 적용한 것”이라 설명했다. 디올의 상징적인 꽃이 남성용 꽃으로 변형됐고, 레오파드 프린트의 스커트 쇼츠(치마 바지)가 거리낌 없이 등장했으며, 핑크빛 파스텔 트위드는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남성복과 여성복의 성별 교차는 패션쇼에 참석한 셀러브리티들의 디올 룩에서 더욱 드라마틱해졌다. 슈퍼모델 앰버 발레타는 화이트 셔츠에 통이 넓은 핀턱 팬츠에 커다란 남성 로퍼로 매니시 룩을 연출했고, 여배우 누미 라파스는 헐렁한 회색 스트라이프 팬츠 슈트에 남성 구두를 매치시켰는데, 덩치가 큰 남자 친구의 슈트와 구두를 그대로 입고 나온 듯 보였다.
그에 비해 디올 하우스 앰버서더인 차은우는 스커트처럼 보일 정도로 바지 폭이 넓은 쇼츠에 깊게 파인 브이넥 니트와 검은색 양말과 부츠를 스타일링했다. 차은우가 매니시 룩의 여성복을 입은 듯 보이고, 여성 셀러브리티들은 남성복 그 자체를 입은 듯 보였다.
앞서 밀라노에서 진행됐던 2024년 봄·여름 프라다 남성복 패션쇼의 오프닝 룩은 순간 여성 모델이 남성복을 입고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잘록한 허리와 둥글게 입체 재단된 넓은 어깨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블랙 셔츠와 짧은 쇼츠를 입은 남성 모델은 촉촉하고 투명한 붉은색의 립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의 이번 남성복 컬렉션의 테마는 ‘유동적 형태(Fluid Form)’로 ‘몸의 절대적 자유(an absolute freedom of the body)’를 탐구하는 여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건 곧 2024년 봄·여름 남성복 패션쇼를 지배했던 트렌드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별을 넘나드는 패션 트렌드
지난 몇 시즌 전부터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는 대세가 되고 있다. 패션 트렌드에서는 성별의 경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여성복 같은 남성복, 남성복 같은 여성복 의미 이상, 스타일의 자유이자 선택권에 대한 재정의가 이뤄지고 있다. 여성복이든 남성복이든 자신의 취향대로 그날이나 그 시즌에 따라 입고 싶은 스타일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의미로 ‘성별 경계가 없는’의 젠더리스(genderless)가 아닌, ‘유동적으로 성별을 오가거나 믹스하는’ 젠더 플루이드 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곧 ‘남성미’와 ‘여성미’의 혼성이 아닌 ‘나만의 미’라 할 수 있다. ‘플루이드’란 단어 그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남성과 여성적 스타일을 오가며 나만의 스타일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성별과 스타일에 대한 자유 권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성적 정체성과 무관하다.
루이비통 남성복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며 패션계 최고의 이슈를 일으킨 퍼렐 윌리엄스는 아내 헬렌, 4명의 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성공한 프로듀서, 가수, 기업가로서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아이콘인 퍼렐 윌리엄스는 샤넬의 트위드 재킷과 진주 목걸이를 매치시키는 등 성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타일로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이번 봄·여름 루이비통 남성복 컬렉션을 통해 성공적인 데뷔로 갈채를 받은 퍼렐 윌리엄스는 패션 아이콘답게 최고의 패션쇼 게스트 룩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겐조, 로에베, 디올 등 수많은 패션쇼에 초대되어 1973년생 50세란 나이를 믿을 수 없는 감각적인 패션쇼 룩을 연출했는데, 이번 패션위크 기간 동행한 아내 헬렌과 아들 로켓과 함께 패밀리 젠더 플루이드 룩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어떤 날은 아내 헬렌이 더 남성적인 룩을 연출하기도 했고, 아들 로켓도 전형적인 틴에이저 힙합 룩 안에서 소년과 소녀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오고 갔다.
물론 퍼렐 윌리엄스의 첫 번째 루이비통 남성복 컬렉션도 젠더 플루이드가 돋보였다. 루이비통의 상징적 패턴인 다미에와 카무플라주(camouflage·얼룩덜룩한 보호 무늬가 들어간 밀리터리 룩의 하나)를 합친 독창적인 ‘다무플라주((Damouflage)’와 작고한 루이비통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의 유산을 계승한 스트리트 룩으로 파리의 퐁네프 다리를 물들였다. 퍼렐 윌리엄스도 즐겨 입는 스커트처럼 보이는 폭넓은 무릎길이 쇼츠와 형형색색의 컬러들과 패턴, 남성의 진주 목걸이와 브로치 장식, 스피드 백을 포함한 다양한 백의 스타일링은 퍼렐 윌리엄스 스타일 그 자체이기도 했다.
패션 트렌드로서 젠더 플루이드는 이제 구찌를 떠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구찌 시대부터 점차 패션계 전체의 현상이 되어갔다 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구찌의 남성복 컬렉션 데뷔 패션쇼에서 하늘거리는 리본 장식의 블라우스와 레이스 장식 시스루 톱을 입은 남성 모델을 등장시켰었다. 또한 남녀 컬렉션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그것이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 말하며 남녀 컬렉션을 통합한 패션쇼를 진행했다. 발렌시아가 역시 남녀 통합 컬렉션을 선보여 왔다. 발망(Balmain)의 액세서리 디자이너였던 루도빅 드 생 세르넹 (Ludovic de Saint Sernin)은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따 ‘LdSS’란 브랜드를 론칭했는데, 남성복인지 여성복인지 구분할 수 없는 디자인에 남녀 구분 없는 통합 사이즈를 선보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제시카 블래클러(Jessica Blackler)는 ‘메이크업에는 성별이 없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제카 블랙(Jecca Blac)’이란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를 론칭했다. 제카 블랙의 광고에는 성별 무경계 메이크업을 한 남녀가 동시에 등장한다.
“젠더 플루이드는 곧 선택의 자유”
유니섹스와 젠더리스에서 젠더 플루이드로 흘러온 패션 트렌드는 이번 봄·여름 남성복 패션위크를 통해 패션의 주류가 됐음을 증명했다. 그렇게 패션에서 젠더는 성 구분이 아닌 ‘취향’이 됐다. 성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과 전혀 무관한 스타일로서의 취향일 뿐이다. 남성이어도 진주 목걸이와 레이스, 플라워 프린트, 핑크를 좋아할 수 있으며, 이것이 남성성의 상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팬츠 스커트를 입거나 트위드 재킷에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성적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으며, 취향에 따라 여자 친구나 아내의 액세서리나 백을 들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 또한 퍼렐 윌리엄스가 매우 남성적인 룩부터 여성적인 스타일링을 자유롭게 넘나들 듯, 개개인의 기분과 느낌에 따라 데일리 룩을 선택할 수 있다. 패션 트렌드로서 ‘젠더 플루이드’는 곧 ‘선택의 자유’란 의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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