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포럼] 기업 위해 '변리사의 소송대리' 허용한 EU
변호사 반대 뿌리치고
기업 요구대로 소송대리 허용
한국 국회는 정반대 행태
변리사가 특허침해소송을 대리해도 될까. 이 질문에 관한 변호사의 대답은 유럽과 한국이 똑같다. "노(No)"라는 것이다. 법을 잘 모르는 변리사가 소송을 대리하면 소송의 품질이 떨어질 거라고 했다. 변호사만이 소송을 대리할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특허소송의 당사자인 기업의 대답은 정반대다. 유럽과 한국 기업 모두 제발 허용해달라고 했다. 외교부에서 작성한 '유럽연합(EU) 특허법원의 변리사 소송대리 허용 조약' 설명 자료에 따르면 노키아·아스트라제네카·BP 등 37개 유럽 기업이 그런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이들은 "변리사의 능력은 특허 처리 경험이 없는 평균적인 일반 변호사보다 우수하다"고 했다.
EU는 기업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6월 출범한 유럽 통합특허법원에서는 변호사뿐만 아니라 변리사도 소송을 대리할 수 있다.
한국 기업도 유럽 기업과 똑같은 기대를 걸고 성명서를 내기는 했다. 반도체산업협회와 디스플레이산업협회, 배터리산업협회, 바이오협회는 5월 말 "기술 개발에서부터 특허 등록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한 변리사를 소송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며 "변리사의 소송대리를 허용해달라"고 했다. 벤처기업협회를 비롯한 10개 혁신기업 단체도 지난해 성명을 내고 "기술이 급격히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변호사 단독으로는 특허 분쟁의 신속한 처리가 어렵다"고 했다. 과학계는 더 일찍 성명을 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한국공학한림원은 2021년 "변리사 없이 특허침해소송 사건을 진행하는 것은 과학기술 성과를 이해 못 한 국가적 무능의 소치"라고 했다.
그러나 EU와 달리 한국 국회는 기업 요구를 무시했다. EU처럼 변리사가 단독으로 소송을 대리하는 것은 당연 불가다. 변호사와 공동으로 소송을 대리하는 법안마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막혔다. 법안의 무덤이라는 법안심사제2소위로 넘어간 상태다. 2소위는 법안이 몇 년씩 묵히다 폐기되는 곳으로 악명 높다.
EU는 변리사의 소송대리를 놓고 변호사가 아닌 기업의 요구를 우선했지만, 한국은 정반대로 변호사들이 이겼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법사위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내고는 "변호사가 소송대리를 수행할 때 비로소 헌법상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변협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 변협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변리사의 소송대리를 반대한다고 했다. 그런데 특허침해소송에서 국민은 '기업'이다. 그 기업이 변리사의 소송대리를 허용해달라고 간청하는 상황이다. 변협 주장대로라면 기업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일을 국회에 요구하는 셈이다. 기업이 그토록 어리석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바이오는 정부가 국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한 대한민국 대표 산업이다. 이들 업계가 자해 행위를 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대한민국 기업은 최소한 무엇이 이득이고 손해인지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 변호사에게만 특허소송을 맡기는 게 특허권을 지키기 위한 최선이라면 기업 스스로 그렇게 할 것이다. 변호사와 변리사를 공동 선임하는 게 이득이라면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기업이 선택할 문제다. 외교부 자료가 인용한 독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대학교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변리사의 소송대리를 허용하면 "소송대리인 간의 경쟁 유발로 소송비용이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돈 없는 중소기업도 소송으로 특허권을 지킬 수 있다. 먼저 변리사 소송대리를 허용한 영국에서 그런 효과를 봤다. 한국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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