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때'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찾아간다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 때를 기다린다는 말의 허상
드라마의 영향이 분명한데, 삼국지 위나라의 모사 사마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의견이 몇 년 전부터 부쩍 늘었다. 어떤 분은 주제를 더 좁혀서 부탁한다.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란 주제로 사마의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마 그 드라마에서 내세운 사마의에 대한 부제가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고객의 니즈, 아니 어처구니없는 불평을 접했다고 하더라도 "부당하다.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니즈를 살펴라. 마케팅에서 철칙이고 훌륭한 교훈이다. 마케팅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마케팅이 아니라 철학과 인생원칙이란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때를 기다린다"는 말처럼 어이없는 오류도 없다. 누군가가 때를 기다려서 성공했다는 교훈은 더 어이없다. 당장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날 때까지 곧은 바늘로 낚시를 하며 기다렸다는 강태공의 고사는 뭐냐? 삼고초려하는 유비를 만난 제갈량의 고사는 뭐냐?
강태공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다. 실화라고 해도 그건 껍데기만 본 것이다. 삼고초려? 유비가 삼고초려한 것은 맞지만, 소설에서 나오는 그런 식의 방문은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부연설명을 하자면 '때를 기다린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날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설정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사냥꾼이 맹수를 사살하려면 타깃이 정확히 조준선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지만 우리는 종종 맹수를 사냥하는 순간을 기다리기 전에 맹수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경험, 자질이 필요한지를 잊는다. 그뿐 아니다. 늑대왕 '로보' 및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135명을 잡아먹은 아프리카의 식인사자), 흰고래 '모비딕' 같은 보기 드문 상대와 싸우려면 탐색, 위치선정, 사살과 방어계획에서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완전한 맞춤형 승부를 벌여야 한다. 결국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총알을 발사하려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준칙에 불과하다. 난세의 승부, 전쟁에서 승부의 본질은 이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때를 기다린다는 말은 어떤 이유에서 탄생한 것일까? 마케팅의 자세로 돌아가서 이 말의 본질, 그 속에 있는 니즈와 욕구를 찾아보기로 하자.
◇ 밀물과 썰물 사이의 기회
전쟁에선 종종 공수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노도처럼 진군해 온 아시리아의 군대가 팔레스타인을 휩쓸었다. 최초의 공세는 다행히 팔레스타인에서 멈췄지만, 아시리아의 군대는 포기를 몰랐다. 그들은 대를 이어 남진을 계속했고, 마침내 시나이 사막을 넘어 이집트를 정복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중 몇몇 전투는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아시리아의 전쟁화 부조에 남아 있다. 이 부조에는 사나운 아시리아 군대뿐 아니라 완벽한 구조를 지닌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의 성채들이 등장한다. 해자, 가파른 경사로, 이중삼중의 성벽, 촘촘히 세운 방어용탑. 성들의 구조를 보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이민족의 침공으로부터 천 년을 지켜주었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보다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요새들이 아시리아의 군대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이 비극의 원인은 소재였다. 중동지역의 놀라운 요새들은 흙벽돌로 지었는데, 철기가 등장하면서 강철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아시리아의 부조 중에는 한 병사가 검으로 성벽을 쳐서 구멍을 뚫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만큼 성벽의 강도가 취약했고, 강철과 성벽의 강도 사이에 불균형이 발생하면서 구조적으로는 완벽한 요새들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300년쯤 지나서 그리스 반도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작은 소국이었던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을 연이어 격파하면서 졸지에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리스인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강한 줄 전혀 알지 못했었다. 자신들의 잠재력을 알게 된 그리스의 몇몇 야심가들은 거꾸로 페르시아 침공을 꿈꾼다.
하지만 이들의 야심은 좌절하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게 영광을 양도해야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결정적 이유가 펠로폰네소스 내전이었다. 내전 자체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페르시아 정복을 위해서는 그리스 통일이 먼저 필요했고,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을 통한 통폐합의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내전이 너무 질질 끌었다. 너무나 오랜 내전에 그리스 폴리스들은 승자와 패자 할 것 없이 모두 지쳐 버렸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군사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결정적 이유가 공수의 불균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수비의 과도한 우세였는데, 구조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성채는 팔레스타인의 요새에 비해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단단한 암석으로 구축되었고, 대부분 거대하고 매끈한 바윗덩어리 위에 세워졌다.
이 새로운 불균형과 요새의 나라를 허문 사람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은 그리스군은 몰랐던 투석기를 사용했는데,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언덕 위에 있던 성들은 투석기의 공세를 피할 수가 없었다.
로마군은 돌과 벽돌, 그들만의 위대한 발명품인 콘크리트를 이용해 성을 더 단단하고 복잡한 구조로 완성했다. 팔레스타인의 흙벽돌 요새가 콘크리트 구조물로 재탄생한다. 이 놀라운 축성술 덕분에 그들은 훨씬 적은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요새를 세우고,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더욱 발달한 요새를 제국 곳곳에 세우고, 수도를 방어하는 세계 최강의 요새를 건립함으로써 제국의 수명을 천 년 이상 연장시켰다.
◇ 대포의 영광과 굴욕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부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신문기 대포 덕분이었다. 덕분에 지금도 이스탄불의 도시 곳곳에는 이 대단한 독재자와 청동대포를 찬양하는 벽화나 장식을 쉽게 볼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대포가 성벽을 부순 건 아니었다. 아직은 대포의 성능이 너무나 조악했다. 그러나 수비대를 피로하게 하고, 전의를 떨어트려 공략에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그리고 결국은 대포가 성벽을 파괴할 운명이기는 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때를 시작으로 점점 강력해지기 시작한 대포는 다시 공격 우위의 전술로 전쟁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무기 대포에 가장 열심인 나라가 프랑스였다. 언제나 전장에 상대보다 더 많은 대포를 배열했던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을 만나 유럽 최강의 육군이 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폴레옹의 영광은 포병을 전장의 여왕으로 등극시켰고, 세상의 모든 군대에 “공격! 오직 공격!”이라는 철학을 주입시켰다.
하지만 이때부터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인간의 두뇌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특수강이 발명되면서 총과 대포는 이전의 청동대포는 물론이고 강철로 만든 주물 대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콘크리트 축성술이 순식간에 대포를 뛰어넘었다. 나폴레옹이 죽고 겨우 40년 후에 벌어진 남북전쟁에서 공수의 비율은 다시 한번 참혹하게 역전되었다. 튼튼하게 구축된 요새들은 거의 무적이었다. 요새를 점령하는 유일한 수단은 성벽 밑에 터널을 뚫어 폭파시키거나 병사들을 끊임없이 희생시켜, 요새의 탄약을 소모시키는 방법뿐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되자 총과 대포의 여신마저 요새의 편이 되었다. 야전, 공성전, 모든 형태의 전투에서 공격과 수비의 희생비는 10:1이 넘었다. 철조망, 참호, 요새의 벽으로 보호되는 기관총과 대포는 들판을 달려 공격해 오는 적군을 학살했다.
이 엄청난 비극을 경험한 생존 장교들은 상반된 태도로 다음 전쟁을 대비한다. 수비의 우세에 매혹된 사람들은 마지노선을 쌓았다. 강철과 콘크리이트 토치카, 자동화된 포대, 철도로 연결되는 개미굴 같은 지하요새, 지금 봐도 신기할 정도로 잘 만든 첨단요새였지만, 다시금 화력집중과 기동을 이용한 공격전술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전격전'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격적인 전술을 창안한 한 무리의 장교들은 20세기 전쟁사에서 거의 신이 되었다.
그 신의 지위가 21세기 전쟁에서'전차무용론'이 등장할 정도로 다시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판정승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드론, 위성,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은 공격, 수비를 가리지 않고 모든 형태의 전투에 공포의 신으로 군림하는 중이다.
◇ 때가 아니라 예측과 도전이다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두 종류가 있다. 과거의 경험을 붙들고 지나가 버린 때를 기다리는 사람과 변화를 예측하고, 신무기와 신전술을 장착하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때를 기다리는 사람, 때를 기다려서 역사와 운명을 바꾸는 사람은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창조의 때를 대비하는 사람이다. 알렉산드로스부터 나폴레옹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명장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오직 하나 이것뿐이다. 이것이 때를 기다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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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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