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차라리 말 말고 주먹으로 하시라
상대 부정하는 화법엔 대응할 언어 없어
대화하며 논의 진전시킬 뜻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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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말을 듣다보면 귀를 씻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쌍욕이나 과다하게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말폭탄’을 던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쓰는 말이 도저히 상대가 돌려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국가 세력’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란 말은 상대에게 어떻게 돌려줄 수 있는가? 이런 말은 들었더라도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대응할 수 있는 말은 유일하게 똑같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정치인이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만하는 것이 어떤 정치체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의회’란 문자 그대로 내 의견을 가지고 의견을 가진 상대와 토론하고 논쟁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의’(議) 할 의사도 없고 ‘의’ 하지도 않으면서 왜 모여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의’란 말 그대로 의견, 즉 말을 주고받고 돌려주는 과정이 아닌가? 도무지 저 정치권에서 지금 ‘주고, 돌려주고’ 있는 말이 ‘받을 수 있는 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극에서 주고받는 말과 증여론
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거기서 진전되는 것이 없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쟤가 받을 수 없잖아. 다시 말해봐.” 배우들을 가르치는 곳에서 가장 많이 보는 모습이다. 교수는 학생이 대사를 할 때마다 그게 상대 배역 학생이 받을 수 있는 말인지 아닌지를 계속 묻는다. 상대가 말을 받을 수 있게 말하면 그건 말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직 말이 아닌 말, 텍스트에 쓰인 ‘글’인 말, 대사에 불과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라는 대사가 있다고 하자. 이 말을 그저 문장으로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사랑하는 주체인 ‘나’를 강조하는지, 사랑의 대상이 ‘너’임을 강조하는지, 아니면 내가 하는 행위가 ‘사랑’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상대가 어떻게 받을지를 모른다.
“나를? 왜 나를 사랑해?”라고 할지, “그게 사랑이라고? 기가 막혀서”라고 할지, “네가?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못 들은 것으로 할게”라고 할지를 정할 수가 없다. 받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인류학의 증여론에서는 사람의 관계가 세 단계로 이뤄졌다고 본다. 먼저 줘야 한다. 주면 받는 과정이 있다.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 이 세 단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관계는 지속된다. 이 중 하나라도 펑크가 나면 그 즉시 관계는 중단된다. 주지 않으면 아예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고, 주더라도 받지 않거나 받을 수 없으면 그다음 행동인 돌려주는 행위가 없다. 돌려줄 수 없거나, 돌려주지 못하면 흐름이 끊기고 관계가 단절된다.
연극에서 배우들이 주고받는 말이 이런 증여론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말이야말로 받을 수 있도록 줘야 하고, 준 말을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 만일 돌려주기 싫으면 받지 말아야 한다. 물론 받고도 돌려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문화는 받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공동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한 사람으로 추방하거나 완전히 소외시켜버리는 등 가혹하게 처벌했다. 공동체란 받으면 돌려줄 거라는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보면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주고, 받고, 돌려줘야 한다는 규범에 가장 강력하게 매인 인간 행위가 말이지만 동시에 가장 손쉽게 깨질 수 있는 것도 말이다. 돈이나 물건을 받았을 때는 그 ‘값’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게 꽤 명확해 보이지만, 말의 경우에는 준 말에 상응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기 쉽지 않을뿐더러 실제로는 그 말에 돌려주지 않았으면서도 돌려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연극 연습은 정확하게 주고 정확하게 받고 돌려줄 것을 명확하게 결정하는 아주 좋은 연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극이 깨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고, 받고, 돌려주는 말은 아무나의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로 그 말을 하는 당사자의 입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의미’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세계가 무서워요”와 “저는 이 세상이 무서워요”와 “저는 이 사회가 무서워요”는 다 같은 말이지만 어떤 말을 선택할지는 사람의 나이와 성별, 계급 등 정체성에 따라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지식인이라면 ‘세상’이라는 말보다는 ‘사회’나 ‘세계’를 쓸 확률이 높아진다. 말을 보면 대체로 그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물론 그 말이 ‘주고, 받고, 돌려주고’의 말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나같이 글과 말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상대가 ‘아,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단어’가 있다. ‘담론’이다. 혹은 문장으로는 “담론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내가 ‘담론’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즐겨 주고받는 말이라는 뜻인지, 직장 내 어떤 공식적인 말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그때마다 깨닫는 것은 내가 말걸기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담론’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듣는 사람들은 그들과 내가 다른 언어공동체, 즉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 ‘다른 세계’에 속한 내 말은 공식적으로는 듣는 척하되 자기 세계로 심각하게 끌어들여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여전히 다른 말과 규칙들로 굴러갈 것이기에, 내 말은 그들과 오로지 ‘공식적’으로만 관계를 갖게 된다. “담론을 바꾸자”고 하는 말인데 전혀 담론을 바꾸지 못하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말을 주고, 받고, 돌려주는 일은 상당히 까다롭고 아슬아슬하다. 아무리 같은 언어공동체에 속해 같은 단어로 낄낄거리던 동료라고 해도 한 끗만 벗어나면 어제와 똑같은 말을 돌려주더라도 관계 자체가 파탄 나버리기도 한다. ‘개×끼’라는 말이 어제까지는 친밀감의 표시였으나 오늘은 너무나 모욕적인 쌍욕이 되기도 한다. “오늘 참 화사하게 입으셨네요”라는 말이 옷을 잘 고르는 것에 대한 칭찬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상대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지자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 정치권의 말은 나름의 정교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첫째는 서로에게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대화하며 논의를 진전시킬 의사 자체가 없다고 봐야 한다.
의회라는 정치체제의 존재가치로 보면 참으로 비극적이다. 저 공간은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법을 논의를 통해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 정도의 대안을 생산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구하라법’(부양 또는 양육 의무를 저버린 가족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민법 개정안) 등 여러 법안이 세월이 아무리 가더라도 통과되지 않는 이유다. 한국 정치권의 말은 논의를 진전시킬 의사가 없는 말이다.
둘째는 이 말이 목표로 하는 지점은 정치권 내의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이다. 형식은 상대에게 하는 말이지만 지지자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형식과 달리 실제에선 받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받는 사람을 향해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무대 ‘위’가 무대가 아니라 ‘무대와 객석 사이’가 무대가 된다는 점이다. 원래 무대는 무대와 객석 사이라는 무대의 배경 정도로 전락했다. 이 새로운 무대는 시민의 삶을 규율하는 그 어떤 법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대’가 아닌가? 그러니 정확하게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주고, 받고, 돌려주더라도 생산되는 것이 없다.
이런 정치적 말은 지금처럼 격변하는 시기에 시민의 삶을 더욱더 나락으로 밀어넣는다. 특히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세계를 짓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이전 법으로 도저히 규율되지 않는 새로운 불법/탈법적 행위를 만들어낸다. 밤새워 연구하고 토론하며 쫓아가더라도 법이 뒤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주고 돌려받으면서 토론과 논쟁을 진전시킬 유일한 말이 ‘받을 수 있는 말’인데 이 말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으니 시민의 법과 생활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진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나오게 할지는 명확하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지치고 부정적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지루한 과정을 다 생략하고 한 방에 정리할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바랄 것이다. 그 결단력의 핵심은 법을 중단시켜버리는, 낡아서 더 이상 규율적 효용을 상실한 법을 의지로 끊어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법을 중단시키고 법들의 법을 정초하는 입헌적 권력의 출현을 바라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의 끝이 좌로 가든 우로 가든 ‘독재’임은 명확하다.
‘말다운 말’을 하는 존재의 생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 정치권에 독재를 할 만한 역량이 있는 정치인이 우에도 좌에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아가 한국 시민 가운데 우든 좌든 독재를 절대 용납하지 못할 사람의 수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더라도 이들의 지지와 승인 없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지속시키는 건 당분간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들에 의해 ‘말다운 말’을 하는 존재가 소멸하거나 사멸하지 않고 정치권에 어떻게든 살아남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충고하고 싶다. 무대 ‘위’로 올라가 서로 받을 수 있는 말을 할 의사가 없다면 정치의 요체인 ‘말’을 보존하고 구원하기 위해 말하는 대신 정치권이 하면 더 신날 일이 있다. 주먹싸움이다. 말로 말고 주먹으로 하시라. 그래서 ‘말’의 역할과 가치라도 보존해주시라. 물론 이 주먹싸움이 흥행에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실제 링 위에 올라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말로도 주먹으로도 쓸모없는 당신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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