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인의 직격 야구] '비운의 투수' 장명부, 이젠 평온한 안식을...

권정식 2023. 7. 1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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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 시절 힘차게 역투하는 장명부. 타자들과의 머리싸움이 능수능란해 '너구리'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장명부(1950~2005)에 대한 빚이 30여년만에 탕감됐다. 프로야구 OB 모임인 일구회가 KBO리그 초창기를 풍미했던 '풍운아' 장명부를 뒤늦게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

일구회는 지난 4일 "일본 오사카에서 장명부 유족을 만나 그동안 혜택을 보지 못한 게임사 성명권 금액을 전달했다"고 발표했다. 일구회는 프로야구 게임 제작사가 선수 실명을 사용하는 대가(성명권)로 지불한 금액을 관리하고 있는데 뒤늦게 장명부 유족들의 요청으로 그의 몫을 지급하게 됐다.

재일교포 출신인 장명부(일본명 후쿠시 히로아키)는 1968년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데뷔, 1982년까지 뛰며 통산 91승84패(9세이브) 평균자책점 3.68을 남겼다. 특히 1979년(7승9패 1세이브)과 1980년(15승6패)에는 히로시마 도요카프 주축 투수로 팀의 일본시리즈 2연속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83년에는 KBO리그에 진출,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고 30승16패(6세이브) 427⅓이닝 평균자책점 2.36이라는 불후의 기록을 세웠다.

KBO리그에서 4시즌 통산 55승79패(18세이브) 평균자책점 3.56을 기록한 그는 은퇴후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으나 1991년초 필로폰 투약혐의로 구속돼 KBO에서 영구제명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그해 12월 일본으로 돌아가 택시 운전, 건물 경비 등 힘든 생활을 하다 2005년 4월 13일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가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83년 한국 프로야구에 데뷔하자마자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쌓았던 장명부가 왜 도박(카지노)과 마약에까지 손대는 철부지로 변했을까.

'버린 아이는 천덕꾸러기가 된다'는 속담을 소환한다. 1983년 1월, 그의 삼미 입단전으로 돌아가보자.

선수들과 상견례를 마친 장명부는 허형 구단사장, 이호헌 KBO 사무차장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허 사장이 "한해 30승을 거둘 수 있느냐"고 운을 띄웠다. 이에 이호헌 사무차장이 "지난해 박철순이 24승을 거뒀지만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한해 100경기를 치르는 상태에서 30승은 어림도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허 사장이 "만약 30승을 달성하면 연봉 100% 인상에 보너스 1억원을 주겠다"고 말했다. 허 사장이 "각서를 써줄까?"하자 장명부는 "사나이끼리 약속인데 각서는 필요없다"고 해 결정적인 문제의 소지를 남겼다.

당시 1억원이면 지금 시세로는 15억원 가량된다. 장명부는 어차피 돈보고 현해탄을 건넌 용병이므로 2,3년 열심히 던져 평생 먹고 살 거금을 챙겨가자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 기어코 30승을 이뤄냈다.

장명부는 시즌이 끝난 뒤 당당히 1억원 지급을 요구했으나 허 사장은 말끝을 흐렸다. 구단주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사안이라 이를 지킬 수 없어 "술자리의 식언(食言)"으로 얼버무렸다.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죽기보다 싫어한 장명부는 한국사람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고 1984시즌부터 야구계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다.

김광수 일구회장이 게임사 성명권 금액 2000여만원을 장명부 유족에게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명부의 아내 후쿠시 지에코 씨와 김광수 일구회장, 장명부의 3남 후쿠시 마사아키 씨. 사진=일구회 제공

1984년 단일 시즌 최다연패(15패), 이듬해 시즌 최다패(25패)를 기록한 것은 분노를 삭이지 못해 포수 미트에 공을 패대기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프로야구 전체가 오물을 뒤집어쓴 2년간이었다. 이때부터 장명부는 카지노에 빠지기 시작했다(일본 국적이어서 카지노 출입가능).

장명부가 1승18패에 그치며 야구계를 떠나게 된 1986년 9월 어느날, 필자는 대전경기후 그의 숙소로 찾아가 간단히 인터뷰를 했다. 그는 몇마디 하더니만 "지금 서울에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 워커힐 호텔 카지노로 가는 것이었다.

이젠 장명부와 또다른 야구계 풍운아인 이해창(원년 멤버로 MBC 청룡 등 7개팀에서 선수생활)이 함께 엮인 필자만이 아는 에피소드를 돌이켜보자.

1991년 10월경 필자와 동갑내기로 가끔 만나던 이해창과 연락이 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해창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좀 있으면 장명부가 온다"고 하질 않은가. "웬 장명부?"

이해창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둘다 이래저래 갖고 있던 돈을 다 날려 알거지가 됐는데 아는 조폭에게서 돈을 좀 빌렸다고 했다. 조폭은 두 사람이 돈을 갚을 능력이 안되는 줄 알면서도 빌려줬는데, 막상 돈을 한푼도 못받자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단지 두 사람을 골탕 먹일 셈으로 약 두달간 매일 오후 4시 무렵에 르네상스 호텔 커피숍에 가 한 시간 동안 눈도장을 찍고 가라는 벌칙을 내렸다고 한다. 한때 프로야구판을 호령하던 두사람이 호텔 커피숍에서 벌을 서는 걸 보고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한 기억이 난다.

하여간 일구회 결단으로 큰돈은 아니지만 2000만원이 조금 넘는 성금을 유족들에게 전달한 건 요즘 야구판에서 보기드문 훈훈한 미담이다. 유족에게서 연락이 왔을때 곧바로 성명권 지불을 결정한 것은 구경백 사무총장이다. 그리고 적지않은 출장비를 무릅쓰고 일본 현지로 건너가 유족들에게 직접 전달의 결단을 내린 건 김광수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장명부는 공과(功過)가 있는 인물이다. 한국 프로야구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공과 모두 KBO리그 역사의 일부"라고 말했다.

장명부는 죽기 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자필 문구를 남겼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한때 자신을 속인 한국 프로야구계를 정녕 용서했을까. 본지 객원기자

 

스포츠한국 권정식 jskwon@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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