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이병석의 마지막 한 마디,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

손동환 2023. 7. 1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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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6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5월 18일 오후 2시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깨달음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남들보다 빠르게 깨닫는 이가 있는 반면, 남들보다 느리게 깨닫는 이도 있다.
이병석(상주중 코치)은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뒤늦게 노력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늦게나마 남들보다 많이 운동했다. 그 결과, 자신만의 강점을 찾았다. 인터뷰 말미에는 “늦게 철이 들었다”는 말로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역량을 키워온 유망주
서대전초등학교에서 농구를 시작한 이병석은 대전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대전고등학교에서도 전국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명지대학교로 입학한 후에는 조성훈(현 ES스포츠나눔 감독)-김태진(현 명지대 감독) 등과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학창시절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준 이병석은 2000년에 열린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0순위로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울산 현대모비스)에 입단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최고의 명문이었던 기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0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시합을 많이 못 뛰었어요. 프로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기아에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제가 프로에 갈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사했어요.
기아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팀입니다.
국가대표 선수만 6명 정도 있었어요.(웃음) 김유택 선배님과 강동희 선배님, 김영만 선배님 등 기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분들이 다 계셨죠. 그런 분들을 보는 것만 해도, 저는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선수 이병석’은 데뷔 첫 시즌 21경기 평균 6분 59초 출전에 그쳤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잘하는 분들이 너무 많으셨어요. 그래서 ‘내가 코트에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뷔 초만 해도, 그런 생각이 많았죠. 그렇지만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연구했습니다. 제가 가진 나름의 강점을 생각했어요.

마지막 조각
부산 기아는 2001~2002시즌부터 울산 모비스 오토먼스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름을 변경한 모비스는 2004~2005시즌부터 유재학 감독과 함께 했다. 유재학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모비스는 2005~2006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2006~2007시즌에도 정규리그 1위. 2005~2006시즌에 이어, 두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한 모비스는 부산 KTF(현 수원 KT)와 6차전까지 3승 3패를 기록했다. 안방에서 마지막 경기를 준비했다. 모비스와 KTF 모두 짜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짜냈다. 어느 팀도 7차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유재학 감독이 하나의 수를 내밀었다. KTF의 포인트가드였던 신기성(현 SPOTV 해설위원)의 수비수를 바꿨다. 큰 임무를 맡게 된 이는 바로 이병석. 이병석은 경기 내내 신기성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신기성의 7차전 기록이 비록 21점 9어시스트였지만, 신기성으로 인한 파생 효과가 줄었다. 신기성의 역량을 줄인 모비스는 7차전을 잡았다. 1997년에 여린 원년 시즌 이후 10년 만에 통합 우승. 모비스로 바뀐 후 첫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병석은 모비스 우승의 마지막 조각이 됐다.

모비스는 2005~2006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습니다. 이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당시 유재학 감독님께서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셨어요. 몇 억씩 받는 스타 플레이어를 앉혀두는 대신, 하고자 하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셨죠.
그래서 저도 기회를 얻기 위해 운동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다만, 합류가 늦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팀에 너무 죄송했어요. 그렇지만 감독님께서 저한테 재활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고, 저는 그 시간 동안 상대 선수들의 장단점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게 이전과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지도자가 되고 나니, 유재학 감독님의 그런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어요. ‘유재학 감독님의 결정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정말 힘드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챔피언 결정전 7차전에서 이전과 다른 선수를 막았습니다. 신기성 선수를 시리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비하셨는데요.
6차전까지 신기성 위원을 막은 이는 양동근 코치(현 울산 현대모비스 수석코치)였습니다. 그렇지만 양동근 코치가 당시에 공격도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 신기성 선수까지 막다 보니, 득점력이 점점 떨어지더라고요.
감독님께서도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6차전 저녁에 “너가 신기성을 막아볼래?”라고 하셨고, 저도 “막아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수 이병석’의 수비 전략은 무엇이었나요?
1~2쿼터만 뛴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계속 움직였습니다. 포인트가드가 볼을 많이 만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는 신기성 위원님의 볼 캐치부터 저지했습니다. 그런데 위원님의 활동량이 워낙 많다 보니, 제 체력이 후반에 너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신 위원님의 위력이 줄면서, 저희가 점수 차를 낼 수 있었어요. 7차전도 잡을 수 있었고요.
어려움 끝에 데뷔 첫 우승을 확정했습니다.
프로에 처음 입단할 때부터 모든 순간이 생각났습니다. 뛰지 못했던 시간과 뛰었던 순간 모두 생각났죠. 그래서 눈물이 더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마지막’이라는 그림자
이병석은 ‘데뷔 첫 우승’이라는 달콤한 결과물을 얻었다. 하지만 2006~2007시즌 종료 후 서울 SK로 트레이드됐다. 2009~2010시즌까지 SK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2010~2011시즌 개막 직전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팀을 옮겼다.
2011~2012시즌 개막 전에는 서울 삼성으로 행선지를 옮겼다. 삼성은 이병석 영입으로 수비력 강화를 생각했지만, 이병석은 기대만큼의 수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후 선수 생활을 접었다. 개인 통산 484경기 평균 20분 1초 출전에, 평균 5.1점과 1.1개의 3점슛 성공으로 KBL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006~2007시즌 종료 후 SK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저희 팀 가드진이 부족했습니다. 양동근 코치가 2006~2007시즌 종료 후 군에 입대했거든요. 그리고 SK에서 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트레이드가 성사됐어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를 원하는 팀에서 뛰는 게 더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자랜드와 삼성에서도 뛰었습니다.
유재학 감독님도 그렇지만, 유도훈 감독님도 엄하셨어요.(웃음) 유재학 감독님을 겪지 않았다면, 유도훈 감독님과 함께 했던 시간이 힘들었을 겁니다.(웃음) 또, 유재학 감독님과 비슷한 면이 많으세요. 승리를 향한 집착이 크시고, 준비도 많이 하셨거든요.
그리고 삼성에는 최고참 신분으로 합류했습니다. 출전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팀을 더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최고참으로서의 책임감과 이타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려고 했어요.
2011~2012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사실 상무 입대 전부터 무릎 수술을 권유받았어요. 그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활로 버텼죠. 그런데 결국은 한계가 오더라고요. 이전만큼의 스피드와 힘을 내지 못하다 보니, 수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은 어려웠어요.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은퇴 후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병석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2018년부터 모교인 명지대학교에서 코치를 맡았고, 2020~2021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창원 LG의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대학교와 프로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쌓은 이병석은 2022년부터 상주중학교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발전 가능성이 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주중학교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의미 있게 여겼다.

명지대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선수 은퇴 후 의류 사업을 잠깐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 본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구를 늘 생각했죠. 그러던 찰나에, 한 선배님으로부터 명지대 코치를 제의받았습니다. 그때 명지대 코치 자리가 갑작스럽게 비었거든요.
비록 팀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새벽과 오전, 오후와 야간 모두 선수들을 보러 나갔어요. 다만, 제가 운동했던 시절과는 다른 면이 많아서, 초반에는 조금 힘들었어요.
2020~2021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창원 LG의 코치를 맡으셨는데요.
아마추어 선수들 같은 경우, 성적이나 경기력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그래서 운동을 대하는 태도가 간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프로는 모든 게 돈으로 연결돼있어서, 선수들이 오히려 절실해요. 그런 절실한 마음가짐이 저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줬습니다. 또, 프로 선수들 같은 경우, 할 수 있는 공수 움직임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의 활용 방법이나 선수들의 강점을 끌어내는 방식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LG 코치에서 물러난 후, 상주중학교의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프로에서도 대학에서도 느낀 점이 있습니다. 선수들의 기본기가 예전처럼 탄탄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중학생 선수들에게 공 잡는 자세와 농구에 필요한 모든 기초 동작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본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물론, 기본기에만 집중한다면, 당장의 결과물을 얻는 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학생 선수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장’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기본기를 조금이라도 더 다져야, 높은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본기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 보람도 느끼고 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라, 성장 속도가 빠르거든요.(웃음)

“철이 늦게 들었습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병석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자신의 농구 인생이 어땠냐?”고 말이다.
이병석의 대답은 이랬다. “늦게 철이 들었다”고. 이병석의 말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병석이 이유를 설명한 후,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의 타협을 최소화하는 선수가 더 높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교훈이 이병석의 대답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의류 사업을 잠깐 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초등학교 4학년부터 평생 농구만 했습니다.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농구고, 앞으로도 농구 관련 일을 하고 싶어요.
‘이병석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웃음) 상무를 다녀온 후에야, 더 열심히 했기 때문이죠.
이유가 있을까요?
상무 입대 전만 해도, ‘쟤네는 나랑 똑같은 시간 동안 똑같이 운동했는데, 나랑 왜 실력 차이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상무에서 그 차이를 알게 됐습니다. 제 입대 동기 중에 국가대표가 많았는데, 제가 그 친구들보다 노력을 덜했더라고요. 제가 저와 타협을 하는 동안, 그 친구들은 그 단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죠. 그래서 제대 후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지금도 농구가 너무 좋고, 농구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다음 생에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 이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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