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비상·양극화 심화 속 상속세 인하 정당한가
세수 부족과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가운데 경제단체들이 상속세 부담을 완화해달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세수 비상을 의식해서 연내 상속세 개편을 보류했지만, 경제단체들의 요구는 내년 총선 이후까지 겨냥한 사전포석 성격이 짙다. 지난해 법인세·부동산 보유세 인하에 이어 부자감세 논란이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손경식 회장은 지난 6월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세정책 방향’ 토론회에서 “경쟁국보다 불리한 조세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상의도 정부에 2023년 조세제도 개선과제를 건의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벗어난 높은 상속세율을 낮춰달라”고 요청했다. 전경련은 지난 5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의 정책간담회에서 상속세 부담 완화를 주문했다. 이들의 요구는 상속세 최고세율을 현행 50%에서 25~30%로 인하, 최대주주 주식 할증평가 20% 폐지, 유산세 과세방식을 유산취득세로 전환, 5단계 과표구간의 상향조정 내지 3단계로 축소 등 전면적이다.
경제계가 기업 경영 활력과 경쟁력 저하 우려를 앞세워 상속세 부담 완화를 주장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목소리를 부쩍 높이는 배경에는 친기업을 표방한 윤석열 정부가 있다. 지난해 숙원이었던 법인세율 인하가 이뤄진 것처럼 현 정부 때 상속세 인하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관행으로 여겼던 사전 상속·증여를 통한 세금 회피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2020년 별세한 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유족들은 12조원의 상속세를 신고했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작고했을 때 상속세 고지액 176억원과 비교하면 무려 680배에 달한다. 최근 세대교체가 이뤄진 다른 재벌그룹 총수일가 역시 잇달아 고액의 상속세를 신고했다. 고 구본무 엘지 회장의 유족들은 2018년 9215억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유족들은 2019년 2700억원을 신고했고,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유족들도 2020년 4500억원 가량을 신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주진형 전 한화증권 사장은 “세정이 촘촘해지고, 사회적 감시도 강화되어 상속세를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갈수록 좁아지면서 경영권 승계를 앞둔 재벌에게는 상속세 인하가 다급한 현안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상속세 없는 국가가 더 많다?
전경련은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절반이 넘는 20개국이 (직계비속에 대해) 상속세를 과세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OECD 회원국들의 상속 관련 세제와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실상은 다르다. 2021년 기준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 상속세를 부과하는 국가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일본·독일 등 24개국에 이른다. 반면 비과세 국가는 오스트리아·멕시코·노르웨이 등 7개국에 그친다. 나머지는 자본이득세를 부과하는 국가가 호주·캐나다·뉴질랜드·스웨덴 등 4개국, 추가소득세로 부과하는 국가가 라트비아·콜롬비아·코스타리카 등 3개국이다. 자본이득세는 상속 시점에 과세하지 않고, 상속인(자손)이 해당 자산을 매각할 때 피상속인(부모)의 최초 자산매입을 기준으로 차익을 계산해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전경련은 상속세 부과국 중에서 룩셈부르크·스위스·슬로베니아·헝가리·리투아니아 등 5개국의 경우 직계비속이 상속할 때는 상속세를 면제한다면서 비과세국에 포함했다. 자본이득세와 추가소득세를 부과하는 7개국도 마찬가지다. 자본이득세와 추가소득세를 상속세에서 이름만 바뀐 것으로 볼지, 아니면 상속세 폐지로 볼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OECD 공식 통계에서 상속세 과세국으로 분류한 5개국을 비과세국이라고 우기는 것은 억지스럽다. 상속세 완화 주장을 무리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국민의 눈을 속였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OECD 내 비과세 국가 더 많다” 주장
38개국 중 24개 부과…공식통계 왜곡
“대주주 할증 포함 최고 60%” 강조
상속+소득세, GDP·총조세 비중 낮아
불완전한 소득세, 상속세가 보완 성격
“가업승계 불가능” 강조하지만
세금없는 대물림에 불신감 여전
상속-소득세 연계 사회적 합의 과제
■상속세 부담이 OECD 최고다?
경제단체가 상속세 완화를 주장하며 가장 앞세우는 논거는 해외 주요국보다 최고세율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우리나라 상속세율은 최고 60%로 OECD 국가 중 최상위권 수준이어서, 최고세율을 OECD 평균 수준인 25%로 과감히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OECD 회원국 중에서 일본(55%)에 이어 2위이고, 최대주주로부터 주식을 상속받을 때 20% 할증평가되는 것까지 포함하면 60%로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속세 명목세율만 갖고 다른 나라와 단순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상속세 실효세율(상속재산에서 비과세 재산·장례비·각종 공제를 제외한 과세표준 대비 결정세액)은 28.6%로, OECD 회원국의 평균 상속세율과 별 차이가 없다.
전문가들은 상속세는 소득세와 연관지어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 개인은 부의 축적과정에서 소득세를 낸 뒤 마지막으로 상속세를 낸다. 만약 소득세에 대해 완벽하게 공정과세가 이뤄진다면 이중과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소득세가 완전하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는 부동산 보유세와 양도세, 금융자산 관련 세금 등 자산에 대한 소득세가 매우 불완전하다. 상속세가 일찍부터 불완전한 소득세를 보완하는 세금으로 불린 이유다. 상속세는 소득세를 제대로 내지 않고 부를 축적한 사람을 상대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부과하는 최후의 관문 역할을 한다.
2000년대 초반 스웨덴 등 일부 유럽국가들을 중심으로 상속세를 자본이득세로 전환하거나 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소득의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내어 소득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한 인사는 “우리나라는 자산소득의 공정과세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매우 약하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상속세를 완화해 대기업의 세금없는 대물림을 허용하는 방안에 국민이 얼마나 찬성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경영계는 우리나라가 상속세뿐만 아니라 소득세 최고세율도 높다는 주장도 편다. 우리나라의 상속세(50%)와 소득세(45%)의 최고세율 합계는 95%로 일본(상속세 55%+소득세 45%)에 이어 OECD 2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세부담을 파악하려면 상속세와 소득세가 국내총생산(GDP)와 총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야 한다. ‘2023 대한민국 조세’를 보면, 2021년 기준 우리나라의 소득세와 상속증여세의 GDP 대비 비율은 6.8%로, OECD 평균 9%에 못미친다. 또 총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2.8%로, OECD 평균인 24.2%에 비해 낮다. 상속증여세 비중은 OECD 평균보다 높지만, 소득세 비중이 작기 때문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전경련은 소득세는 뺀 채 상속증여세의 비중이 OECD 최고 수준이라는 반쪽짜리 주장만 반복하고, 보수언론도 아무런 검증없이 이를 앵무새처럼 따라부른다.
■소득불평등 심화 상관없다?
상속세의 주요 기능은 부의 집중을 완화하고, 소득재분배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 연속 개선되다가 2021년 다시 악화됐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2021년 0.333으로 전년(0.331)보다 높아졌다. 지니계수는 소득불평등 정도를 0과 1 사이에서 나타내는 지표로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다는 의미다. 문 정부의 포용정책과 코로나 위기 초기 재난지원금 지급 등의 영향으로 소득분배가 개선된 약효가 떨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2022년부터는 윤석열 정부가 재정건전성과 부자감세를 강조하는 모순된 정책으로 복지가 위축되고 있어, 소득불평등이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이 상속세를 완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부의 대물림을 방치해서 기회균등이 약화하고 사회 불평등이 심해지면 자본주의 체제의 안전성마저 해칠 수 있다. 빌 게이츠, 데이비드 록펠러, 조지 소로스 등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인들은 2000년대 초 미 정치권에서 상속세 폐지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반대 뜻을 밝혔다. 자본주의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경영승계가 무조건 선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기업이 생존하고 발전해야 일자리와 소득창출이 가능한데, 우리는 징벌적 상속세제로 인해 사실상 가업승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기업이 있어야 고용과 투자가 이뤄지는 것은 맞는 얘기다. 하지만 기업이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경영승계가 필요하다고 단정짓기 힘들다. 선진국 기업 중에는 경영승계 없이도 전문경영인 중심 경영으로 좋은 실적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인들은 회사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이 드물다. 재산의 대부분을 공익재단에 기부해 사회를 위해 사용한다.
상속세의 핵심에는 대기업 총수에 대한 과세, 경영권이 딸린 주식에 대한 과세 문제가 놓여 있다. 경영승계와 관련해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불법 논란이 사라지지 않는 등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불신이 여전한 현실은 상속세 인하에 큰 장애요인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별세한 뒤 유족들이 12조원이라는 거액의 상속세를 신고하자 보수언론들은 과도하게 높은 상속세율 때문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이 회장과 자녀들이 지난 30년간 세금없는 승계를 위해 숱한 편법·불법 논란을 일으켰고,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발행 사건으로 유죄판결까지 받은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한다.
경제단체는 최대주주 주식 할증제도의 폐지도 주장한다. 임동원 한경연 연구위원은 “경영권 프리미엄이 이미 주식에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세법상 실질과세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주요 국가들도 대주주 보유주식에 따른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주식가치를 평가한다. 미국과 영국은 주주가 실질적인 지배력이 있다고 인정되거나 주식보유로 영향력 등이 커진 경우 주식을 할증 평가한다.
■세수부족·부자감세 논란 개의치 않는다?
지난 5월까지 국세가 1년 전보다 36조원이 덜 걷히면서 세수부족 비상이 걸렸다. 법인세와 종부세 등 부자감세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정부는 감세정책을 고수한다. 약자복지 축소와 경기침체 가속화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경영계의 상속세 인하 주장은 국가경제의 어려움은 돌아보지 않고 집단이익만 챙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경제계의 상속세 인하 요구를 대부분 반영하지 않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상속세 과세체계를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은 좀 더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세수부족 사태를 의식했다는 분석이 많다.
■유산취득세로 전환
상속세는 유산세와 유산취득세 두가지 유형이 있다. 우리나라가 채택 중인 유산세 방식은 부모가 남긴 상속재산 총액에 세금을 물린다. 유산취득세 방식은 자손이 각자 물려받는 재산을 기준으로 나눠서 과세하기 때문에 세부담이 줄어든다. 경영계는 유산취득세가 개인의 납세능력에 따라 세금을 납부할 수 있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상속세를 부과하는 OECD 24개 회원국 중에서 유산세 방식은 한국·미국·영국·덴마크 등 4개국에 그치고, 나머지 17개국은 유산취득세 방식이다. 문재인 정부 때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재정개혁특별위원회가 2019년 유산취득세 방식으로의 변경을 권고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병욱·송기헌·유동수 의원은 지난 4월 토론회를 열고 유산취득세 전환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놨다.
상속세 개편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선결과제이다. 상속세 최고세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자산소득의 공정과세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약하고, 대기업의 세금없는 대물림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도 현실이다. 결국 상속세 부담 완화와 소득세 공정과세 문제를 함께 놓고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세진 국회입법조사처 재정경제팀장은 “상속세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 소득재분배 효과에 대한 객관적 비교 검증을 통해 합리적 상속세제 개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면서 “문재인 정부 때 소득세 최고세율을 높이면서 상속세 문제를 함께 검토할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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