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덤 만큼 뜨겁다… 책 밖으로 나온 ‘작가 덕후’

박세희 기자 2023. 7. 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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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모으고 낭독회 참여 넘어
작가 사인받으려 수십미터 줄
팬아트 올리고 ‘덕질 잡지’도
젊은작가들 SNS로 팬과 소통
신간·행사일정 공유 팬덤 형성
출판사도 대면행사 늘려 홍보
한국문학 주요 독자 30~40대
아이돌 덕질에도 익숙한 세대
“내 작가는 내가 키운다” 환호
지난달 16일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김초엽·천선란 작가의 대담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선 채로 지켜보고 있다.

지난달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은 끝났지만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는 ‘사건’이 있다. 이슬아 작가 사인회에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선 팬들의 행렬, 김초엽·천선란 작가대담 행사장에 몰려든 100여 명의 인파. 한 평론가는 “작가를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팬이 모인 것은 처음 봤다”며 놀라워했다. 요즘 ‘작가 덕질’이 뜨겁다. K-팝 아이돌 등 연예인의 전유물이었던 ‘덕질’이 작가들을 향했다. 이전에도 ‘스타 작가’는 존재했고 특정 작가를 애정하는 독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덕질’보단 ‘애독’(愛讀)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바로 사 읽고 작품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가끔 낭독회나 사인회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금의 ‘작가 덕질’은 이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작가 덕질’을 위한 잡지 ‘글리프’의 부록인 ‘덕력평가 문제지’.

◇직접 홍보하고 팬아트 그리고…‘작가 덕질’ 잡지까지

이전에는 작가를 좋아하고 작품을 애독하는 모든 과정이 개인적인 일이었다면 이젠 개인을 벗어나 집단으로 이뤄지고 있다. 소장하고 있는 작가의 책들을 바라보며 혼자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라, SNS를 통해 특정 작가의 덕후임을 인증하고, 덕후들끼리 오픈채팅방을 통해 소통하며 실제 오프라인 만남을 갖기도 한다. 작가가 진행하는 행사나 지지하는 운동에도 함께한다. ‘아이돌 조공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가들을 향한 선물 세례와 작가가 사용하는 물건을 따라 구매하는 현상 역시 새롭다.

덕질의 핵심 활동 중 하나인 ‘2차 창작’에도 나선다. 소설 속 인물들을 팬아트로 그려 올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카드뉴스로 책을 소개하는 미디어 ‘책 끝을 접다’에 구병모 작가의 대표작인 ‘위저드 베이커리’의 ‘점장’이 배불뚝이 아저씨로 그려지자 수많은 팬이 자신만의 ‘점장’ 이미지로 다시 그려 SNS에 올린, 이른바 ‘위베 대란’이 일기도 했다.

‘작가 덕질’을 위한 독립출판 잡지도 생겨났다. 2019년 시작된 엠디랩프레스의 ‘글리프’가 그것.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노는 장이 되길 바란다”는 ‘글리프’는 정세랑을 시작으로 정유정·김초엽·최은영 등 작가들의 출생부터 가장 최근작을 내기까지의 연대기를 짚고 우리가 ‘왜’ 이 작가를 사랑하는지를 풀어낸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지를 흉내 낸 ‘모의덕력평가 문제지’를 통해 작가 덕후들의 ‘덕력’도 평가한다.

덕질의 기본인 ‘영업’에도 물론 충실하다. 영업이란 내 아이돌의 멋진 점을 널리 알려 또 한 명의 팬을 확보하는 것. ‘작가 덕질’ SNS 활동의 초창기 형태인 트위터 팬 계정 ‘봇’(bot)도 새로운 작가 덕후들을 끌어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정세랑 작가의 문장을 공유하며 각종 행사와 출간 소식을 전하고 있는 ‘정세랑봇’ 소개글엔 “정세랑 작가님이 쓴 문장을 올립니다. 책을 구입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1만 명의 팔로어를 지니고 있는 이 계정 운영자는 “작가 덕질도 아이돌 덕질과 똑같다. 내 작가가 잘 먹고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김초엽·천선란 작가의 대담 행사 모습.

◇SNS 소통 능한 젊은 작가 세대와 ‘덕질’ 공력 쌓인 팬들이 만났다

예전에는 ‘문학 자체’가 애정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작가 덕후들은 ‘작가 개인’을 좋아한다. 작가가 내놓는 글뿐 아니라 작가가 살아가는 방식, 그의 가치관 등에 크게 공감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SNS다.

SNS 사용에 익숙한 요즘 젊은 작가들은 각자 자신의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한다.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이나 낭독회, 사인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때로는 오늘 어떤 생각이 들었고 어떤 감정인지도 공유한다. 그간 책으로만 작가를 접하던 독자들은 SNS를 통해 작가를 더욱 잘 알게 되고 가까이 느끼게 됐다. 팬덤을 몰고 다니는 박준 등 젊은 시인의 시집을 출간한 ‘난다’의 김민정 대표는 “팬들이 아이돌의 스케줄을 미리 알고 챙기는 것처럼 독자들이 SNS를 통해 작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알 수 있게 되다 보니 저절로 팬덤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온라인으로 소통했던 작가와 독자는 오프라인에서 만났을 때 훨씬 친근하게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현재 한국 문학의 주요 독자층인 30∼40대가 ‘덕질’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도 ‘작가 덕질’ 열풍의 배경 중 하나다. 작가 에이전시인 블러썸크리에이티브의 지영주 대표는 “덕질에 익숙한 세대의 덕질 대상이 아이돌 가수에서 작가로 자연스럽게 옮겨간 게 아닐까 생각한다”며 “최근 경향 중 하나가 해외 유명 작가보다 국내 작가에게 더 뜨겁게 환호한다는 점이다. 내가 발굴한 아이돌을 깊이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발굴해 키워낸 작가를 향한 뜨거움”이라고 말했다.

관련해 구독형 메일링 서비스 ‘일간 이슬아’로 팬덤을 구축한 뒤 수필, 소설 등을 낸 이슬아 작가의 예는 흥미롭다. 지금의 인기 작가가 되기 전 그를 먼저 알아본 ‘일간 이슬아’ 독자들은 그를 “내가 키운 작가”로 느낀다. 이슬아 작가를 덕질하고 있는 최모(26) 씨는 “소녀시대를 10년 넘게 덕질했다. 소녀시대를 동경했듯 이슬아 작가를 동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서전 당시 열렸던 이슬아 작가 사인회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 모습. 헤엄출판사 제공

작가 덕후들이 늘면서 출판사들의 마케팅도 달라지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만나는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하고 팬들을 위한 굿즈 판매를 더욱 늘리는 것. 한 출판사 관계자는 “요즘 팬들은 더 적극적이다. 작가 행사에 미진한 점이 있으면 출판사에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고 굿즈 제작을 요청하기도 한다. 팬분들의 요구에 최대한 맞추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작가와 출판계가 팬덤 중심으로 움직이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이미 팬덤을 가진 이들에겐 유리하지만 그렇지 않고 SNS도 잘하지 못하는 작가에겐 너무 불리한 상황”이라며 “‘좋은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때 기존의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물론 좋지 않은 작품이 인기를 얻는 사례는 별로 없지만, 인기가 작품성이 되는 상황도 있어 경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세희·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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