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페론주의·군부독재 잔재… 정치병에 신음하는 ‘아르헨의 심장’[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2023. 7. 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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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카페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28) 부에노스아이레스
원주민 역사 없는 백인 비율 97% ‘하얀 도시’… 야만과 문명 사이 분열의 씨앗 품어
쿠데타·포퓰리즘으로 점철된 현대사… 아름답던 ‘남미의 파리’ 빈곤·파산에 시달려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본 부에노스아이레스 전경. 잘 정돈된 도시의 이면엔 빈곤과 실업이 자리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인간 문명을 뒤로한 채, 대륙에 다가간다는 사실이 기뻐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스물세 살 청년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면서 말했다. 뒤에는 유럽풍 도시가, 앞에는 팜파의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체는 안전하고 쾌적한 문명에서 ‘사막’이라 불리는 팜파와 그 너머 밀림의 야만을 향해 나아갔다.

아홉 달 여행 끝에 체는 말했다. “위대한 영혼이 인류를 적대적 두 진영으로 나눈다면, 나는 민중과 함께하리라.” 도시의 안전한 진료실에서 의사로 사는 대신 사나운 밀림에서 투사로 살아간 그의 삶은 이 여행에서 착취당하는 민중의 가난하고 참혹한 현실과 마주치면서 탄생했다.

라울 오르티스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자기 서문을 써줄 어떤 조상도 없는 장자”다. 이 도시엔 원주민 역사가 없다.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가 바다에서 한 줄기 순풍을 만나 라플라타강 하구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엔 사람이 거의 닿지 않았다. 멘도사는 강을 거슬러서 내륙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이 땅에 마을을 짓고, 그 이름을 ‘좋은 바람’, 즉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붙였다.

마을은 얼마 안 가 없어졌고, 1580년 후안 데 가라이가 다시 마을을 건설할 때까지 야생으로 남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손톱만 한 도시다. 현재 인구 1560만, ‘남미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이 도시는 여전히 너무나 작다. 도시를 둘러싼 막막한 바다와 압도적 초원 앞에서 사람들은 초라한 존재감과 함께 무력감과 공포에 시달린다. ‘도시의 익숙하고 안온한 풍경’과 ‘초원과 밀림의 낯설고 끔찍한 풍경’의 대립은 아르헨티나인들의 내면에 새겨진 핵심 풍경이다.

‘포로 여인’(1837)에서 에스테반 에체베리아는 ‘사막’을 여행하다 납치된 후,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 원주민을 죽이고 무사히 돌아온 백인 여인을 그려낸다. 이 낭만 서사시엔 문명과 야만의 대립, 즉 문명의 아름답고 순수한 정수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야만에 포획당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가 담겨 있다.

‘파쿤도’(1845)에서 도밍고 사르미엔토도 도시 바깥 ‘사막’에서 야만의 지배를 발견한다. 팜파를 떠도는 파쿤도 키로가의 삶을 그린 이 작품은 야만의 생태학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파쿤도는 잔인하지도, 피에 목말라 있지도 않다. 다만, 열정이 끓어오르면 통제되지 않는 야만인일 뿐”이다. 수틀리면 총을 쏘고 채찍을 휘두르는 그의 승리는 “모든 시민적 형식”의 파괴다. 파멸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즉 문명을 수호하는 일이 지성의 과제이다.

화려한 색의 집이 줄지어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보카의 카미니토 거리.

1816년 독립 이후, 아르헨티나는 혼란에 빠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통합파와 지방 내륙 연합의 연방파로 나뉘어 내전을 치렀다. 1880년 통합파의 승리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 연방 수도가 됐다. 외세를 무찌르고 독립을 이룩하며 혼란을 이기고 야만을 정복하는 긴 투쟁 과정에서 이 도시는 항상 중심에 있었다. 문명과 야만의 변증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의 심장이 됐다.

야만은 도시 내부에도 있었다. 1829년부터 1852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배한 독재자 후안 로사스는 그 증거였다. 그는 ‘법의 재건’이란 명분으로 피의 통치를 통해 정치 안정을 도모하고 자유무역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끄는 남미식 개발 독재의 원형을 제공했다.

에체베리아는 ‘도살장’에서 한 순진한 청년이 겪는 끔찍한 사건을 통해 로사스의 야만을 고발했다. 청년은 황소를 조롱하고 고문하면서 살해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술 취한 군중들은 “피 묻은 내장을 뽑으면서 춤추는” 도살자(로사스)에게 열광한다. 청년은 야만 행위를 멈추라고 호소하나, 흥분한 군중은 도리어 그를 때려죽인다. 독재와 야만에 길든 인간은 모두 파쿤도가 된다.

아르헨티나는 영토가 넓디넓고, 사람이 극히 모자라다. 텅 빈 땅을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정치의 유일 목표다. 후안 알베르디는 이를 하나의 테제로 정립했다. “정치란 사람을 곧 거주시키는 일이다.” 물론, 단서가 있다. 늘어난 인구가 노동력만 제공해야지, 소수 백인 엘리트의 권력을 침해하면 안 된다! 정치가 불가능을 목표로 삼으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찾아온다. 이것이 이 나라 역사의 큰 흐름이다.

1880년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 도시로 올라섰다. 깨끗한 광장, 넓은 대로, 쾌적한 카페, 지하철과 전차, 다채로운 유럽풍 건물 등 코스모폴리스적 풍경을 갖추었다. 쇠고기, 양모, 밀, 옥수수 등을 수출해서 축적한 막대한 부, 항구를 통해 흡수한 첨단 유럽 문명이 눈부신 변화의 동력이었다. 앙드레 말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제국의 수도’로 칭할 정도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에선 무척 드문 백인 도시다. 백인 비율이 97.2%에 달한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등 초기 국가 지도자에게 “유럽이 아닌 것은 야만”이었다. 이들은 ‘사막 정복’이란 군사작전을 벌여 팜파에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유럽인 수백만을 받아들여 백인 인구를 퍼뜨렸다. 이들에게 문명화란 백화(白化)였다. 하얀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그 성취였다.

부작용도 따랐다. “삶이 이런 식이어선 안 돼!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7인의 미치광이’에서 로베르토 아를트는 울부짖었다. 이주자 아들인 그는 막장에 몰린 도시 빈민이 범죄를 통해서만 존재를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빈 몸으로 몰려든 이주자들은 흐느끼는 탱고 음악에 취해 삶의 고통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대지주들 횡포에 팜파에 정착지 못하고 도시 변두리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에비타’에서 노래하듯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있는 자들의 세상, 가진 자들의 천국이었다. 도시 상층 엘리트 계층과 주변부 하층 이주자 사이의 격차는 아르헨티나에 분열과 대립의 씨앗을 뿌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라자 데 마요(5월 광장).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916년 급진민주주의 세력의 정권 획득, 1930년 쿠데타에 따른 정치 혼란, 대공황에 따른 경기 침체로 갈등이 불거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터널’에서 에르네스토 사바토는 “지옥의 벽들은 갈수록 밀폐된 상태가 될 것”이라고 도시의 검은 미래를 예감했다.

1946년 노동자들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안 페론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정책을 펼쳤다. 페론주의라 불리는 그의 대중 영합 정책은 강력한 분배, 폭넓은 사회 보장으로 하층 계급에선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정적을 향한 무자비한 탄압, 천문학적 고물가로 인한 생활고로 1955년 군부 쿠데타를 불러들였다. 아르헨티나 현대문학의 상징 보르헤스는 페론주의를 문명의 패배, 감옥과 죽음이 이어지는 “괴물의 축제, 아무도 믿지 않는 사기극”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양심 로돌포 왈시는 ‘집단 학살’에서 쿠데타 이후 한 쓰레기장에서 비밀리에 총살당한 무고한 페론주의자들의 삶을 통해 페론주의를 옹호했다.

페론주의와 군부독재의 이중주는 아르헨티나 현대사의 두 축이다. 1970년대 초 망명했던 페론은 돌아와 다시 대통령에 올랐고, 1976년 경기 침체를 틈타 군부는 두 번째 페론 정권도 붕괴시켰다. ‘국가 재건’의 이름으로 1983년까지 7년간 자행된 군부의 폭압은 끔찍했다. ‘더러운 전쟁’ 끝에 시민 2만 명이 실종, 살해되고 200만 명이 망명길에 올랐다.

“말은 앞으로 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작은 불씨와 같은 겁니다.” ‘인공호흡’에서 리카르도 피글리아는 말할 수 없는 세계, 군부가 침묵을 강요하는 억압적 세상에서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를 모색했다.

루이사 발렌수엘라는 ‘무기의 변화’에서 기억상실에 걸린 주인공 라우라가 로케 대령에게 성폭행당하면서 서서히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그렸다. 라우라는 로케를 암살하려던 게릴라로, 고문당하면서 기억을 빼앗겼다. 고통을 견디면서 그녀가 언어를 되찾는 과정은 강요된 망각과 싸우는 과정을 은유한다.

198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다시 봄을 맞았다. 그러나 도시는 아직 옛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도시 자체는 현대화해 고층 건물이 즐비하나, 인구 다수는 극심한 빈곤과 실업, 부정의와 불평등에 시달리는 중이다.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가 섞인 신페론주의 경제정책, 여전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는 고질병인 정치 불안, 경제 위기, 사회 혼란을 해결치 못했고 이는 잦은 국가 파산으로 이어졌다.

‘어느 실직자의 기도’에서 후안 헬만은 외쳤다. “하느님이 있다면, 내려와 보시오,/ 난 이 모퉁이에서 굶어 죽을 지경이오,/ (중략)/ 일이 없어요, 일이,/ 좀 내려오시오, 와 보시오,/ 내 꼴을, 이 찢어진 신발을,/ 이 고뇌, 이 텅 빈 창자를,/ 내 한 입 채울 빵 한쪽 없는 이 도시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언제쯤 이 기도에 응답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탱고

탱고는 19세기 후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를 가득 메운 하층 이민자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육체를 빨아들이고 영혼을 휘감는 듯한 이 정열과 관능의 음악은 흔히 반도네온 소리에 맞춰 남녀가 강하게 밀착해 복잡한 발놀림을 주고받으면서 ‘밀당’을 즐기는 형태로 표현된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탱고는 라플라타강에 속한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의 밀롱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하바네라다.” 여기에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민속음악이 뒤섞여 영향을 주었다.

페론주의

페론주의는 20세기 중반 후안 페론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이 추진한 경제정책이다. 페론 자신은 정의주의라 부른 이 정책은 높은 임금 인상, 최저임금 실시, 하루 8시간 노동 등 노동권 보호 정책, 국내 산업 수호 및 수입 대체 산업 육성 등 민족주의 경제정책, 사회 안전망 확충 등 공동체적 사회정책이 특징이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할 때, 페론주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 지속 불가능한 재정 적자 등 극심한 부작용을 낳는 포퓰리즘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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