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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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3m, 신차의 길이
볼보의 신차 발표회는 보통 신차 발표회와는 조금 달리 밀라노에서 개최한다. 왜 밀라노일까 생각해보니 도로에 답이 있었다. 밀라노는 서유럽 중에서도 작은 차를 많이 타고 다니는 도시다. 밀라노를 비롯한 유럽은 도시 자체가 오래되어 주차 시설을 확충하기 어려우므로 차 자체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보기 힘든 스마트가 굉장히 많았다. 한국에서는 여러모로 인기가 떨어진 트위지도 일상의 한 부분에 있었다. 소형 골프 카트보다 작은 시트로엥 전기차 에이미(ami)도 자연스럽게 거리를 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차들이 평행주차의 왕처럼 운전하고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작은 차가 눈길을 끌 것이다.
볼보는 늘 조금 다른 길로 간다. 현재 거의 모든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시아를 노린 제품을 만드는 중에 볼보는 유럽 시장을 노리는 소형 프리미엄 SUV를 만드는 식이다. EX30의 타깃이 밀라노처럼 열악한 주차 상황에서도 좋은 차를 찾는 유럽인이다. 소형 SUV는 새로운 시장을 노리는 볼보의 새로운 세그먼트일까. 그래서 서유럽 대도시 중에서도 패션과 스타일로 유명한 밀라노를 행사 장소로 잡은 걸까.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채 10 꼬르소 꼬모 근처에 있는 전시회장에 도착했다.
3.6초, 볼보의 성능
행사장은 작은 무대였다. 전 세계에서 온 프레스들이 앉아 무대를 바라보자 홍보 영상이 시작되었다. 볼보 EX30과 함께하는 일상을 보여주는 영상에는 이채롭게도 싱글 대디와 딸 한 명이 나왔다. 도시의 2인 가족은 볼보 EX30 하나로 충분하다는 감성적인 영상이 끝나고 프레젠테이션 영상이 이어졌다. 볼보 CEO 짐 로완이 직접 나와서 자동차를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짐 로완이 각종 수치를 들어 EX30을 설명하고 영상 속 자동차가 사라지는 순간, 무대의 오른쪽 끝에서 실제 차가 들어왔다. 짐 로완이 운전하는 EX30이었다. 실내로 자동차가 들어오는 건 신차 발표회에서 흔한 설정이다. 다만 EX30은 전기차라 매연이 없으니 실내에서 자동차를 봐도 마음이 상쾌했다. 짐 로완 역시 자동차에서 상쾌하게 내려 제품 홍보 연설을 시작했다.
짐 로완의 키노트를 비롯해 이번 EX30 신차 발표회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자동차의 만듦새만이 아니었다. 정말 인상적인 건 주어진 스펙의 한계를 활용해 ‘새로운 시대의 자동차’라는 세그먼트를 만들어내는 볼보의 맥락과 논리력이었다. 예를 들어 코나보다 작은 4,233mm 전폭은 도시 생활에 충분한 크기로 묘사된다. 전통적 고급 내장재인 가죽 등을 쓰지 않는 대신 탄소발자국을 이유로 폐자재 활용 섬유나 폐자재 플라스틱을 대거 사용한다. 볼보는 나중에 전문 디자이너가 각 소재를 자세히 설명해줄 정도로 친환경 디테일 강조에 공을 들였다.
자동차의 성능 설명도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3.6초, 볼보 EX30이 정지 상태에서 100km/h에 도달하는 시간이다. 짐 로완은 이 사실을 두고 EX30이 ‘볼보 역사상 가장 가속력이 좋은 차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사실 전기모터의 특성상 소형 전기차는 뭐든 폭발적인 가속력을 지닌다.
그러나 볼보는 늘 이래 왔다. 이런 식으로 프리미엄을 남달리 정의했다. 프리미엄에 대한 독자적인 자세와 독보적인 정의가 소비자에게 계속 동의를 얻었다. 옛날부터. 볼보는 20세기 후반 성능 이야기를 하는 경쟁사들 사이에서 안전을 언급했다. 경쟁사의 매끈한 실루엣 사이에서 왜건을 제작해 왜건의 명가가 되었다. 자동차 인테리어에 ‘북유럽 인테리어’ 같은 말을 붙인 것도 볼보다. 볼보는 기술뿐 아니라 의제 설정에도 치밀하다. 이번 신차 발표 현장에서 거듭 느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나오자 베일에 가려 있던 차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볼보 이미지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크로스컨트리’의 EX30 버전이었다. 온로드용 차의 스프링을 개조해 지상고를 올리고 악천후형 타이어를 장착했다. 작은 차이면서도 작은 차인 듯 보이지 않고, 신경 쓴 오프로드 세팅이면서도 왠지 귀여워 보이는, 볼보풍 프리미엄이 돋보였다. 짐 로완의 설명인, ‘EX30은 우리에게 에스프레소 같은 차다’라는 이야기의 한 예 같았다.
EX30이 내세우는 새로운 변화
- 친환경 소재를 대거 사용했다. 재활용 철과 재활용 알루미늄을 구조재로 쓰고, 내장재로는 섬유나 재생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동시에 조립과 설치 품질이 높아졌고, 그만큼 비용도 높아졌다- 기존 자동차에 비해 스피커 구조가 아주 간단해졌다. 자동차 문마다 들어 있던 우퍼를 빼는 대신 자동차의 모든 음향이 전방의 하만카돈 사운드바를 통해 흘러나온다. 그만큼 기계 내부 구조가 간단해질 것이다.
2명과의 인터뷰
제레미 오퍼의 기존 포트폴리오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개 있다. 레보나 미션 오디오, 쿼드 등의 유서 깊은 오디오 제작사 경험이 있다. 어찌 보면 오디오는 자동차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미리 겪었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물리 음원 저장창고를 재생하는 방식에서 스트리밍으로 바뀜에 따라 유럽의 오래된 오디오 제조사는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 시대에 대응해야 했다. 소비자 관심이 몰리는 블루투스 스피커에 진출해 고가품을 만드는 브랜드도, 내 물건을 알아주는 소수에게만 장인처럼 만들어 파는 브랜드도 각자의 생존 비결을 구축하는 셈이다. 제레미 오퍼가 오디오 업계에서 배운 좋은 점이 앞으로 볼보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전시 자동차를 뒤로하고 한국 프레스들이 한 번 더 모였다. 이날 멋진 발표를 보여준 볼보 CEO 짐 로완의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가까이서 본 짐 로완은 확실히 스피치 훈련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어떤 질문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예민한 질문은 티도 안 나게 넘기는 일을 계속해왔다.
제레미 오퍼와 짐 로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동차 업계에서 주된 경력을 쌓은 ‘카 가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짐 로완의 전 직장은 영국의 다이슨이다. 다이슨 역시 어찌 보면 딱 하나인 원천기술(먼지통 없는 흡입 구조)을 꾸준히 연구하며 경쟁사 대비 최고 수준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볼보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카 가이’가 아닌, 타 공업 디자이너를 포함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도 신기했다. 지금 자동차 업계의 숙제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동차 업계는 전동화를 통해 플랫폼부터 무게중심에 이르는 모든 요소가 변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짐 로완과 제레미 오퍼 역시 자동차 말고 다른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으니, 이들이 앞으로 볼보의 방향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볼보 같은 차는 하나뿐
자동차든 뭐든, 경쟁사와 비슷하게 잘하면 뛰어난 아류에 불과하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최고가 되면 해당 개념의 대표 주자가 될 수 있다. 볼보가 안전이라는 주제로 해온 일이고, ex30을 통해 앞으로 주장할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더 빠르고 편한 것 등 즉물적인 지표에 집중할 때, 볼보는 여전히 안전과 디자인 등 사람의 일상을 감싸는 요소를 지켜본다. 그게 볼보만의 이채로운 셀링 포인트다. 볼보만의 이채로운 매력은 밀라노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제레미 오퍼의 말
“우리가 차량을 만들고 차량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이러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볼보가 지금껏 언급해온 가치에 대해 항상 일관성 있게 논하되, 새로운 기술적 방식을 적용해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3D 니트 기술의 경우, 재활용 소재의 마감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테스트와 검증을 거쳤습니다. 또한 어떻게 여러 디테일을 조화롭게 담아낼지 고심한 끝에 아름다움, 럭셔리함과 프리미엄을 지닌 마감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짐 로완의 말
“EX30은 한 잔의 에스프레소와 같습니다. 디자인 전반에 걸쳐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면서 풍부한 인테리어를 실현하니까요. 에스프레소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디자인은 단순화와 중앙집중화 기술을 통해 실현했습니다. 복잡성과 구성 요소를 줄이고 소재를 신중하게 선택해 최고의 기능을 제공하면서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은 좋은 스타일과 취향을 갖고 있어요. 거기에는 디자인과 스타일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가 차에 사용하는 패브릭과 천연섬유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경험을 얻습니다. 따라서 더 많은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Editor :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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