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어라운드 시작한 ‘버블 붕괴의 상징’[기시다노믹스의 힘①]

2023. 7. 10.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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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 기시다노믹스의 힘]

TSMC 신공장 예정지인 구마모토현 기쿠치군 기쿠요정에서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구마모토현 기쿠요 농촌 마을. 불과 1년 전만 해도 배추·무·당근 밭이었던 이곳에 첨단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대만의 TSMC가 2024년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이 공장은 구마모토현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구마모토현의 총생산은 6조 엔(440억 달러)이 조금 넘는다. 현에 대한 TSMC의 초기 투자는 총생산의 약 6분의 1인 1조 엔이다. 업계에선 TSMC의 등장으로 향후 10년간 4조 엔 이상의 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미 고용은 시작됐다. 하루 24시간 운영되는 공사 현장에는 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약 2000명의 노동자가 3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TSMC뿐만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59개 기업이 구마모토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중 반도체 관련 기업이 22개사로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소니의 반도체 전문 기업인 ‘소니 세미컨덕터 솔루션스’ 공장, 세계적 반도체 장비 업체인 ‘도쿄일렉트론 규슈’ 공장이 이곳에 있다. 1980~1990년대 반도체 제국을 일궜던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 부활을 목표로 성장 드라이브를 걸자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 있던 이 지역에 ‘반도체 메카’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 일대 땅값도 급등했다. 일본 국토부가 2022년 9월 발표한 표준 지가에 따르면 반도체 공장들이 밀집한 농촌 마을의 산업용 부동산 가격은 31.6%나 급등했다. 일본 전체에서 가장 큰 폭의 상승이다.


소니는 이번 'CES 2023'에서 TV 등 전자기기를 앞세우는 대신 전기 콘셉트카 '아필라'(AFEELA) 를 공개했다. 소니는 완성차 업체 혼다와 손 잡고 '소니 혼다 모빌리티' 합작회사를 세웠다. 실제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뜻이다. 전자회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니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진=연합뉴스


상전벽해는 기업에도 일어났다. 1980~1990년대 ‘전자 제국’으로 일본을 이끈 소니는 한때 ‘침몰’, ‘몰락’을 대표할 만큼 존폐 위기에 처했지만 최근에는 180도 상황이 바뀌었다. 2003년 3만 엔 선에서 500엔대로 주가가 폭락하는 ‘소니 쇼크’가 터진 지 20년이 지난 올해 4월 2022 회계연도 기준 영업이익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역대 흥행 기록을 모두 갈아 치운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비욘세·해리스타일스 등 세계 최정상 뮤지션들의 소속사이자 음원사인 소니뮤직, 없어서 못 사는 ‘플레이스테이션 5’ 등이 소니의 현주소다.

소니와 쌍두마차로 버블 경제의 상징이었던 종합상사도 발군의 성적을 자랑한다. 최근 일본 주요 종합상사의 순이익은 1조 엔대까지 치솟았다. 미쓰비시는 올해 3월로 끝난 회계연도의 순이익이 전년도보다 25.9% 증가한 1조1806억 엔을 기록했고 또 다른 대형사인 미쓰이는 1조1306억 엔의 순이익을, 이토추는 8005억 엔의 순이익을 냈다고 발표했다. 호리 겐이치 미쓰이 사장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익을 낼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아베X기시다’가 일으킨 상전벽해

버블 붕괴의 상징이었던 일본 주요 회사들이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SMBC닛코증권이 2022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기준 상장사 1308곳의 실적 추정치를 집계한 결과 이들의 영업이익은 총 39조1000억 엔으로 추정된다. 역대 최고 기록이다.


엔저 효과를 톡톡히 본 자동차·반도체·종합상사 등이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실적에 힘입어 일본 증시도 날았다.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 주가(닛케이지수)는 지난 6월 13일 종가 기준으로 3만3000선을 넘어섰다. 닛케이지수가 3만3000선을 넘긴 것은 버블 경제가 정점에 있던 1990년 7월 이후 처음으로 33년 만이다. 연초 이후 닛케이225지수는 30% 올라 주요국 중 상승률 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증시의 대표적인 ‘불 마켓’으로, 30년간 소외됐던 일본 증시의 압도적인 성과다.

변화의 기저에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정책이 있다. 아베노믹스와 기시다노믹스다.

대규모 재정 지출과 완화적 금융 정책, 민간 투자 촉진을 위한 성장 전략 등 이른바 3개의 화살에 기초한 아베노믹스는 지난 10년 일본을 이끌어 온 경제 정책이다. 아베노믹스는 지금도 성패의 논란이 있지만 이를 기반으로 일본 경제는 강력한 유동성이라는 무기를 갖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023년 4월 기준 일본중앙은행의 자산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124%로, 미국 중앙은행(Fed) 25%와 유럽중앙은행(ECB) 32%를 크게 웃돈다. 중앙은행 자산 규모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시중에 돈이 많이 나와 있다는 뜻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견조한 임금 상승과 함께 은행의 2% 목표에 지속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초긴축 통화 정책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반복해 강조하고 있다. ‘엔화 약세’는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과 증시 수익률을 밀어 올렸다. SMBC닛코증권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이 상승할수록 닛케이225에 상장한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도 높은 양의 상관관계로 증가했다. 엔화 하락 시 영업이익이 증가하는 종목은 해운·석유석탄·비금속·차량장비·기기류·정밀기기·고무·화학·농수산·전자·유리·광산·제약·유통·리테일·홀세일·기타 제품·직물의류·부동산·정보통신·건설·육상 교통·제철제강 등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노믹스에 더해 사회 구조를 개편해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기시다노믹스를 추진 중이다. 임금 인상과 주주 환원에 기반한 정책으로 기업들도 정부의 요구에 내실을 다지고 있다. 도카이도쿄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5월 일본 상장 기업들은 3조2600억 엔어치의 자사주를 매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올해 총액은 2022년 사상 최대치인 9조4000억 엔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도카이도쿄연구소의 스즈키 세이이치 주식시장 부문 수석 분석가는 “주식을 재매입할 계획을 발표하지 않은 기업들에 시장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임금 인상 정책으로 일본의 임금 상승률 또한 3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 연맹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는 올해 상반기 산하 노조 5463곳에 제출한 정규직의 임금 상승률은 최종 집계치로 평균 3.58%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김정연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기시다노믹스의 주주 환원 강화는 투자 매력 상승으로, 강력한 임금 인상 정책은 소비 잠재력 증진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일본 기업의 실적 개선과 직결된 엔화 약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기대되고 기시다 정권의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이며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안정감까지 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활을 가로막는 문제는

넘치는 유동성을 바탕으로 일본 내에선 기업의 설비 투자가 급증하고 잇다. 닛케이 조사에 따르면 2023 회계연도에 일본 기업(자기자본 1억 엔 이상 상장사와 비상장사 857개사)의 설비 투자는 전 산업 기준으로 전년 대비 16.9% 증가한 31조6000억 엔(2230억 달러)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투자 금액은 2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해외 투자도 22.6% 증가했다.

집중 투자가 이뤄진 산업은 반도체다. 일본은 ‘반도체 제국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자국 내 글로벌 기업 유치에 속도를 내고 있다. TSMC로 상전벽해한 구마모토현이 이를 입증하는 곳이다.

과거 자타 공인 ‘반도체 강국’ 일본은 1988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의 50%를 차지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쏟아부은 돈만 1980년부터 1985년까지 20억 달러(간접 지원 포함)에 달했다. 일본전기(NEC)·도시바·히타치·후지쯔·미쓰비시·마쓰시타 등 6인방이 일본 반도체, 아니 전 세계 반도체 D램 시장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21세기 산업의 쌀’을 지키기 위한 미국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5년엔 강달러를 멈추기 위해 일본 엔화 가격을 조정하는 ‘플라자 합의’를 맺었고 이듬해엔 일본에 미국산 반도체 수입을 확대한다는 내용의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다. 버블 붕괴 후 ‘잃어버린 30년’에 갇히면서 2019년 전 세계 반도체 매출의 10%까지 떨어졌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일본 내에서 반도체 생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대규모 지원에 나서고 있다. 미·중 간 갈등으로 시작된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지정학적 이점과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앞세워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부활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지원과 기업들의 펀더멘털 개선에도 일본 경제 부활에 ‘신중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일본은행의 초완화적 정책이 하반기 수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본은행의 초완화적 통화 정책 유지가 상당 기간 엔화 약세 기대감을 자극하겠지만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 개선이 가시화되고 있어 엔화 가치의 추가 하락 폭은 제한적이거나 엔화 강세 전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미 통화 약세로 일본 국민들이 급속하게 가난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환율 물가를 고려한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GDP는 2018년 한국에 추월당했다. 올해 명목 달러 기준으로도 뒤처질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니혼게이자이연구센터).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줬고 4위인 독일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1988년엔 세계 시가 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당시 1위를 차지한 NTT는 2위인 미국 IBM과 시가 총액이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데 2022년 100대 기업 중 도요타(49위) 한 곳만이 남아 있다. 

일본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이란 책을 통해 “일본 기업들이 딱히 눈부시게 기술 혁신을 이뤄 낸 것도 아닌데 이익과 주가가 상승한 이유는 일본의 노동자가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베노믹스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최근 주주 환원과 임금 인상에 기반한 기시다노믹스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마지막 일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성장의 발목을 붙잡는 고령화다. 노구치 교수는 “앞으로 일본 경제를 생각할 때 인구 고령화가 가속한다는 사실 또한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며 “이는 경제에 ‘인구 오너스(demographic onus)’라고 불리는 억제 효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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