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사선 함께 넘나든 미군 소대장… 절대 잊지 못해” [심층기획-한·미동맹 70주년]
적 포위에 참호 속 고립됐던 김재세씨
美 맥기 중위 도움으로 포격 뚫고 생존
목숨 걸고 항전… 중공군 상대 첫 승리
군우리 철수작전선 마지막까지 전투
영어 미숙한 상태로 증강된 카투사 1기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가장 먼저 투입
지형 익숙해 척후 등 위험 임무 도맡아
한·미 가교 역할… 서로의 시신 수습도
1951년 2월15일 새벽 경기 양평군 지평리. 중공군 나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아군의 비명이 뒤섞였다. 아군 참호가 하나씩 빼앗기자 언덕 위로 올라오는 중공군 규모가 불어났다. 미 2사단 23연대 2대대 G중대에 배속된 한국군 김재세(95)씨는 1.2m 깊이 참호에 간신히 몸을 구겨 넣었다.

생존한 병력은 그날 오후 미 제5기갑연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중공군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지평리 전투다. 미군은 이 언덕을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목숨을 걸고 남은 한국군 소대원까지 구한 맥기 중위 이름을 따 ‘맥기 언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2009년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낙동강에서부터 인천상륙작전, 지평리 전투 등 승전의 순간뿐 아니라 처절했던 패전 순간에도 카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미 2사단이 괴멸되다시피 했던 평안남도 군우리 전투에서도 김씨가 속한 23연대는 다른 부대들의 철수작전을 지원하느라 마지막까지 전투를 치르다 후퇴했다. 퇴각로가 언제 중공군에게 차단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군의 후미가 공격당하지 않게 최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버텨냈다.

김씨의 서랍에는 현역 시절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1953년 5월이라고 적힌 사진에는 20대의 김씨와 그의 마지막 중대장 ‘찰리 케니’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이 이뤄지던 시절 휴전선 인근 연천지구에 있던 김씨에게 케니 중대장은 “수색을 나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눈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내렸던 날이었다.
“부상하기 전날이었을 거예요. 중대장이 수색을 나가자면서 자기도 같이 가더라고. 수색을 나가 보니까 우리 중대 소속이었던 한국 사람 시신이 있었어.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는 거야, 중대장이. 우리는 형제 아니냐고 하면서….” 김씨는 한참이나 말없이 사진 속 그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요즘 사람들에게 한·미동맹이란 말은 하나의 관용어처럼 자리 잡았지만 김씨에게 동맹은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수사도 아니다. 참혹했던 전장에서 서로의 시신을 수습했던 인류애를 잃지 않았던 동료이며, 다신 일어나선 안 될 전쟁의 상흔을 공유한 공동체다. 미 워싱턴의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있는 ‘추모의벽’에도 유엔군에 배속돼 싸우다 전사한 카투사 7174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른바 ‘잊힌 전쟁’(Forgotten War)의 군인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로 남게됐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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