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사선 함께 넘나든 미군 소대장… 절대 잊지 못해” [심층기획-한·미동맹 70주년]

구현모 2023. 7. 10.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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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카투사 1기’를 아십니까
적 포위에 참호 속 고립됐던 김재세씨
美 맥기 중위 도움으로 포격 뚫고 생존
목숨 걸고 항전… 중공군 상대 첫 승리
군우리 철수작전선 마지막까지 전투
영어 미숙한 상태로 증강된 카투사 1기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가장 먼저 투입
지형 익숙해 척후 등 위험 임무 도맡아
한·미 가교 역할… 서로의 시신 수습도

1951년 2월15일 새벽 경기 양평군 지평리. 중공군 나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아군의 비명이 뒤섞였다. 아군 참호가 하나씩 빼앗기자 언덕 위로 올라오는 중공군 규모가 불어났다. 미 2사단 23연대 2대대 G중대에 배속된 한국군 김재세(95)씨는 1.2m 깊이 참호에 간신히 몸을 구겨 넣었다.

G중대 진지는 23연대 원형 방어선 남쪽 언덕에 있었다. 고도가 낮고 다른 부대와 배치 간격도 멀었다. 중공군들이 사방을 둘러싼 것이 분명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김씨도 이곳에서는 살아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M1 소총을 꼭 끌어안았다.
카투사 김재세씨의 소대장이었던 고(故) 폴 J 맥기 중위가 2007년 C-SPAN2에서 방영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저서 ‘콜디스트 윈터: 6·25전쟁의 감추어진 역사’에 대한 세미나에 참석한 모습. C-SPAN2 캡처
“헤이 킴, 그대로 있다간 죽어. 내려가야 해.” 그의 소대장이던 폴 J 맥기 중위는 날아드는 포격을 뚫고 호에 들어와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다리가 얼어붙은 김씨를 호 밖으로 거칠게 잡아끌었다. 오전 3시15분 진지가 함락됐을 시간 그들은 언덕에서 내려왔다. 지평리 전투에서 처음 유엔군 방어선 일부가 무너진 순간이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생존한 병력은 그날 오후 미 제5기갑연대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중공군이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지평리 전투다. 미군은 이 언덕을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목숨을 걸고 남은 한국군 소대원까지 구한 맥기 중위 이름을 따 ‘맥기 언덕’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2009년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두세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내가 결혼할 때 (맥기 중위가) 아내의 시계를 선물로 보내주기도 했는데 주소가 적힌 종이를 잃어버렸습니다. 죽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라고 김씨는 말했다.
6·25전쟁 당시 미 2사단에 배속됐던 김재세(95)씨가 지난달 28일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정탁 기자
◆낙동강, 군우리에도 있었던 카투사 1기
김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15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구두협정에 따라 창설된 카투사(KATUSA) 1기다. 지금까지 카투사 1기는 미 7사단에 배속돼 인천상륙작전에 처음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전에 김씨처럼 미 2사단에 배속돼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된 이들이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와 있던 김씨는 카투사 협정이 체결된 다음날 서면의 보충대로 입대했다. 구포초등학교에서 2주간 군사훈련을 받은 그는 ‘K-1106567’이란 군번을 부여받았다. K는 유엔군에 배송된 한국군임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K팝, K드라마 같은 ‘K○○’의 원조는 김씨와 같은 카투사들이었던 셈이다.
카투사와 미군들이 처음부터 유대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카투사와 달리 공인 외국어 성적도 없고, 학교 수업 이외의 영어 공부도 제대로 해본 적 없었던 이들은 그저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일 뿐이었다. 모든 미군이 카투사들에 친절했던 것도 아니다.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했고, 보급품 분배에서 은근한 차별도 겪었다. 현지 지리를 잘 안다는 이유로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척후병 역할을 맡기기 일쑤였다.

그러나 낙동강에서부터 인천상륙작전, 지평리 전투 등 승전의 순간뿐 아니라 처절했던 패전 순간에도 카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미 2사단이 괴멸되다시피 했던 평안남도 군우리 전투에서도 김씨가 속한 23연대는 다른 부대들의 철수작전을 지원하느라 마지막까지 전투를 치르다 후퇴했다. 퇴각로가 언제 중공군에게 차단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군의 후미가 공격당하지 않게 최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버텨냈다.

김씨는 후퇴하면서 자신이 데리고 나온 미군 부상병 얼굴까지 기억난다고 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토는 파괴됐고 인간의 존엄성도 말살됐지만 언어도, 문화도 달랐던 미군들에게 일종의 연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참호에 함께 들어가 있을 때면 ‘꼭 함께 살아나가자’, ‘서로를 기억해주자’ 다짐했다고 한다. 수많은 미군과 함께했지만 김씨는 여전히 전우들 이름과 그들과의 추억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카투사 1기 참전용사 김재세(95)씨가 소지하고 있던 군번줄과 그의 부대원 및 마지막 중대장 ‘찰리 케니’와 함께 찍었던 사진. 남정탁 기자
◆전선의 형제애, 동맹 초석 다졌다

김씨의 서랍에는 현역 시절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남아있다. 1953년 5월이라고 적힌 사진에는 20대의 김씨와 그의 마지막 중대장 ‘찰리 케니’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이 이뤄지던 시절 휴전선 인근 연천지구에 있던 김씨에게 케니 중대장은 “수색을 나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눈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내렸던 날이었다.

“부상하기 전날이었을 거예요. 중대장이 수색을 나가자면서 자기도 같이 가더라고. 수색을 나가 보니까 우리 중대 소속이었던 한국 사람 시신이 있었어.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는 거야, 중대장이. 우리는 형제 아니냐고 하면서….” 김씨는 한참이나 말없이 사진 속 그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요즘 사람들에게 한·미동맹이란 말은 하나의 관용어처럼 자리 잡았지만 김씨에게 동맹은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수사도 아니다. 참혹했던 전장에서 서로의 시신을 수습했던 인류애를 잃지 않았던 동료이며, 다신 일어나선 안 될 전쟁의 상흔을 공유한 공동체다. 미 워싱턴의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있는 ‘추모의벽’에도 유엔군에 배속돼 싸우다 전사한 카투사 7174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른바 ‘잊힌 전쟁’(Forgotten War)의 군인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로 남게됐다.

구현모 기자 li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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