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넘던 보부상은 사라져도... 임금님 맛보던 산해진미 '그대로'

김정혜 2023. 7. 10.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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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전통시장]<26>경북 울진바지게시장 
날마다 열지만 매월 2일·7일, 오일장 때 진면목
'바지게꾼' 보부상 원조 상인… 100년 역사 자랑 
매출 줄어 위기에 "관광객 찾는 시장" 변신 모색
편집자주
지역 경제와 문화를 선도했던 전통시장이 돌아옵니다. 인구절벽과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도 지역 특색은 살리고 참신한 전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린 전통시장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오일장이 열린 7일 경북 울진군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인 바지게시장.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과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울진=김정혜기자

경북 울진군 울진읍 한복판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시장이 있다. 바지게시장이다. ‘바지게’는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지게. 과거 이 지게를 메고 백두대간을 넘어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을 바삐 오가던 보부상(바지게꾼)들의 이름을 따 만든 시장이다.

여긴 150여개 점포가 매일 문을 여는 시장인데, 평소엔 조용하지만 매월 2일과 7일, 오일장이 서는 날 ‘울진 최대 시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새벽부터 임시 점포들이 하나 둘 천막을 치고, 빨간 고무대야 몇 개씩을 낀 노점들이 시장 바깥까지 줄지어 자리잡으면, 여느 대형 축제장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종일 발 디딜 틈 없다. 시장 입구 한 과일가게 상인은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강릉에서도 장을 보러 오거나 물건을 팔러 온다”며 “장날에는 전국 유명 시장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물건이 많고 사람이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울진바지게시장 위치. 그래픽=강준구 기자오일자
오일장이 열린 바지게시장이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은 노점상인들과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울진=김정혜 기자

싱싱한 수산물은 기본, 진귀한 산나물은 덤

울진은 동쪽으로 확 트인 동해가 펼쳐지지만, 남·북·서쪽으로는 첩첩이 산이다. 산의 높이도 하나같이 해발 800~900m 이상. 뻥 뚫린 동쪽을 제외하면, 도시 전체가 병풍처럼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셈이다.

이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울진과 바깥세상을 이어준 바지게시장은 무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조선시대 말부터 많게는 100명 이상 떼지어 다니며 백두대간 양쪽 여러 도시를 누비던 바지게꾼들은 울진의 싱싱한 산나물과 수산물을 한 가득 지게에 담아 봉화군까지 들고 가 팔았다. 이들이 며칠씩 열두 고개를 넘나 들며 밟았던 수십㎞의 산길이 바로 ‘십이령 옛길’이다. 지금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트레킹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최근에는 산림청이 울진에서 한반도의 동과 서를 숲길로 이어 조성한 849㎞의 동서트레일 구간에도 포함됐다.

바지게시장 입구에 100년 전 지게에 물건을 실어 울진 등 여러 장터를 누빈 보부상 '바지게꾼'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울진=김정혜 기자

맨몸으로 바지게를 지던 보부상들은 6·25전쟁 이후 넓은 길이 뚫리며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이들이 내다팔던 울진의 진귀한 특산물은 시장 곳곳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면적 2만626㎡로 축구장 3개 크기와 비슷한 바지게시장은 절반이 어시장이다. 깊고 푸른 동해를 끼고 있는 지리적 여건 덕분에, 유난히 싱싱하고 특별히 저렴하다. 울진 앞바다에 거대 수중암초인 왕돌초를 품고 있어서다. 후포항에서 동쪽으로 23㎞ 떨어진 바닷속에 자리잡은 왕돌초는 맞잠, 중간잠, 셋잠 등 3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동서로 3~6㎞, 남북으로 6~10㎞에 달한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다양한 해양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고둥과 산호 등 다양한 해양보호생물이 자라고, 동해안 특산물 대게의 주요 서식지이기도 하다.

바지게시장은 대게철인 겨울이면 살이 꽉 찬 대게와 홍게가 넘친다. 임금님 진상품이던 고포미역은 사시사철 맛 볼 수 있다. 일반 미역보다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해 미식가들 사이 소문이 난 고포미역은 청정 고포마을에서 햇볕과 산소를 충분히 받고 자란 상품이다. 말린 미역을 물에 다시 담가도 거의 불어나지 않는단다.

바지게시장이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리고 있다. 울진=김정혜 기자

포항시에서 1시간 반을 달려 바지게시장으로 장을 보러온 허영주(49)씨는 “울진에 지인이 살아 가끔 오는데 꼭 바지게시장에서 장을 보고 간다”며 “말린 물가자미, 미역은 물론이고 갓 뽑아낸 떡으로 만든 떡볶이는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명물 중 명물”이라고 엄지를 올렸다.

지리적 특성상 어촌이면서도 산촌인 울진은 다른 시장에선 구하기 어려운 임산물도 철마다 볼 수 있다. 해마다 송이철인 9·10월에는 울진이 자랑하는 금강소나무 아래서 자란 귀한 송이버섯을 비롯해 각종 산나물이 철 따라 등장한다. 반기동 울진바지게시장 상인회장은 “왕돌초와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가자미 등 동해에서 나는 수산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저렴하고 싱싱하다”며 “산 속 깊은 곳에서 나는 열매부터 해안가 모래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해방풍까지 갖가지 나물도 맛 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울진바지게시장에서 수산물을 파는 한 상인이 생선을 손질하고 있다. 점포 앞에 가게를 소개하는 입간판이 보인다. 울진=김정혜 기자

역사와 문화를 품은 시장으로

이렇게 다채로운 상품을 갖춘 바지게시장도 지역 인구 감소 탓에 미래를 기약하긴 어렵다. 올해 5월 기준 울진의 주민등록인구 수는 4만6,846명으로, 1년 전(4만7,430명)보다 600명 가까이 줄었고, 5년 전(5만527명)에 비해서는 3,700명 가량 감소했다. 바지게시장 매출도 점점 떨어지는 추세라고 한다.

읍내 복판이라는 접근성과 싱싱한 토산품 덕분에 바지게시장은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곤 있지만, 이렇게 지역 인구가 줄어들고 단골들이 나이를 먹어간다면 조만간 쇠퇴를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인들은 올 초 선정된 중소벤처기업부의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에 많은 기대를 건다. 전통시장 주변의 역사와 문화 공간을 살리고, 시장 특산품 등 고유 특성을 강조해, ‘즐기면서 관광하는 공간’으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바지게시장은 앞으로 2년간 국비 2억2,000만 원에 지방비 2억2,000만 원 등 4억4,000만 원을 들여 관광객을 모을 여러 사업을 추진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변신한다.

경북 울진군의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지난 5월 22일 울진바지게시장 축제장에서 시장의 상징물인 바지게에 물건을 던지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바지게시장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단 제공

울진군에 가볼 곳이 바지게시장만 있는 건 아니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에 관광명소가 많다. 백암산 응봉산 통고산 등 유명 산들이 있고, 구수계곡과 불영계곡도 유명하며, 대형 호텔과 리조트 단지가 있는 백암온천·덕구온천도 있다. 천연동굴인 성류굴도 빼면 섭섭하다. 바닷가로 눈을 돌려도 찾을 곳이 많다. 동해와 맞닿은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고운 백사장의 해수욕장들, 등기산스카이워크, 영동지방의 8경에 속하는 월송정과 망양정, 왕피천케이블카, 국립해양과학관, 해안스카이레일도 줄줄이 들어서 있다. 장대근 울진군 일자리경제과장은 “울진 특유의 다양한 관광자원이 이번 공모 선정에 한 몫 했다”며 “바지게시장이 또 하나 지역 명소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포항에서 강원 삼척시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열차 개통(내년 말 예정)을 호재로 보고 있다. 동해선 울진역은 바지게시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울진버스터미널 앞에 들어선다. 동해선 개통에 맞춰 시장 안 유명 노포와 맛집 홍보를 강화해, 울진을 처음 찾는 관광객의 발길과 입맛까지 사로잡을 계획이다.

휘어진 물길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경북 울진 불영사 풍경. 사진 아래쪽 능선에 부처바위가 있다. 울진= 최흥수 기자

김재탁 바지게시장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단장은 “고객들을 끌기 위해 축제와 야시장 등을 준비하고 있다”며 “변화에 대한 상인들의 의지와 열망이 높아, 계획을 잘 세워 추진하면 관광객이 몰리는 전통시장으로 대변신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울진=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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