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세상] 바다 건너서 벌어지는 일들
학생 시절 ‘어퍼머티브 액션’을 우리말로 뭐라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소수집단을 위한 적극적 차별시정 정책’ 정도로 옮기면 뜻이야 통하겠지만, 이는 정치적 함축과 정책적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해석적 개념을 나열한 번역이기에 낙제점을 면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의미의 밀도와 외연성에 있어서 어퍼메이션과 유사한 울림을 갖는 우리말을 찾으려 애쓰다가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젠 그걸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시대가 돼버린 것일까.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29일 대학입시에서 인종을 기준으로 삼아 지원자를 선발하는 정책이 수정헌법 제14조 평등보호 조항을 위반한다고 판결했다. 트럼프 행정부 이래로 보수파 법관이 다수파를 차지한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6월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를 연방정부가 보편적으로 규율할 수 없고, 각주에서 입법을 통해 규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보수적이라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세상이 변했다고 외치며 변화를 주도하는 듯이 보일 지경이다.
이번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작성한 로버츠 판사는 1978년 어퍼머티브 액션을 유지했던 바키 판결을 포함해서 선례구속의 원칙을 강조하며 논지를 전개했다. 다수의견은 바키 판결에 제시된 파웰 판사의 헌법해석에 따라 대학입시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정책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과거의 차별을 보상하기 위한 시정조치가 아니라 입학생의 인종적 다원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대학당국이 인종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정책을 유지하려면 그 정책이 헌법의 평등보호 조항에 대한 위반이 아닌지 사법부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하버드 대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사법심사에 필수적 응답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입시 불공정성 문제라면 졸다가도 일어나 한마디씩 떠들어대는 입시민족이 이 사안을 다루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중에 어쩐지 유학생은 상관없을 것만 같은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최상위 사립대학 입시에서 과거 역차별을 받았던 아시아 인종 지원자가 앞으로 유리해져서 다행이라는 해석이 있다.
정작 이번 논쟁의 요점이 ‘히스패닉’과 같은 자의적 범주나 ‘중동’과 같은 가려진 범주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인종적 구분을 적용해서 차별을 시정하는 게 정당한지를 따지는 데 있었음에도 그렇다.
이 사안을 정파적 유불리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중단권을 폐지한 이후 치른 중간선거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듯이, 이번 평등보호 조항 판결 때문에 흑인과 라틴계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 유리해진다는 전망이 그중 하나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게 머릿수 싸움의 문제라는 현실주의적 시각도 등장한다. 연방대법원에서 소수파로 전락한 진보진영은 앞으로 대법관 지명권과 인준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좌파니 우파니 편가르기 좋아하는 민족답게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한 차별시정 정책을 두고 벌어진 논쟁을 보면서도 그저 머릿수 싸움으로만 사태를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땅에 사는 이른바 진보의 진정한 고통은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서 우리 편이 이기니 지니 하는 현실에 달린 게 아니다. 평등과 자유, 민주와 공정과 같은 오래된 원리에 대한 새로운 논점들이 등장하고, 변화된 현실에 따라 새로운 논쟁의 장이 확장돼 열리고 있는데, 오래된 구호를 외우듯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그 처지부터가 일단 우울하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도망가고 배신자들만 남았다느니, 아니면 그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느니 하며 한탄하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는 게 고통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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