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희의 아이러니] 내러티브의 종말

기자 2023. 7. 1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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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서사의 물줄기에서
종말의 징조가 보이는 시대
이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꼬마 때 동네에서 밤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어떤 아이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치면, 아이들은 전율을 느끼며 들었다. 간혹 솜씨 좋은 어른이 이야기를 꺼내면 흡사 마법의 세계가 열린 듯했고, 달뜬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초등학교 때 기차역이 있는 수색으로 주산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주산학원 선생님이 이따금 무협지를 육성으로 전달해주었는데, 그때마다 학생들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 몽롱해졌다. 당시만 해도 이야기에 어떤 주술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다.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귀했기에 그것을 즐기는 시간은 삶의 각별한 순간이었다.

조광희 변호사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화된 거대한 시스템이 산업적으로 제작한 이야기를 쉬지 않고 공급한다. 여기에 과거의 전통적인 분위기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려서 겪은 마법 같은 이야기의 전통은 수천년 역사의 끄트머리였나 보다. 이제 이야기는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과 같다. 언제나 준비되어 있고, 조금 낭비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투명한 액체가 되었다. 적어도 에어컨의 냉기보다는 맘 편히 사용하는 서비스가 된 게 분명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왜 이토록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그에 대한 진화론적인 설명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한 가지 설명은 이야기가 정보나 대리경험을 적은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이거나 인지적인 놀이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선호하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러티브에 쓰임새가 있어서 인간이 그렇게 진화했다는 것이다. 다른 설명은 이야기는 별 쓸모가 없고, 그저 진화과정의 우연한 부산물이라는 입장이다. 어느 입장에 서든 우리가 내러티브에 푹 절여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이 수천년부터 고안돼 이어져왔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기억력에 의존한 고대의 구술 전통이 있었고, 그것이 20세기 또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리스 야외극장에서 상연되는 드라마들은 어떠했는가. 어떤 관객들은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확인하는 순간 까무러쳤을 것이다. 인쇄시대를 만난 소설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울고 웃게 했다.

20세기는 영화의 시대였다. 눈부시게 발전한 영화의 내러티브는 현재와 미래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은 <터미네이터>에서 새로운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현실과 가상현실을 기막힌 솜씨로 엮은 <매트릭스>가 그 경계를 더 확장시켰고, <인셉션>과 <아바타> 또한 우리를 감탄시켰다.

이런 창의적인 내러티브들 이후 입을 못 다물 만큼 놀랄 만한 내러티브는 드물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시간을 구부리고, 공간을 찢는다. 꿈을 파헤치고, 기억을 재구성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 속에 아류들도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이처럼 내러티브 산업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변화하고 있지만, 영화 <기생충>의 놀라운 성공 이후의 한국은 갑자기 닥친 팬데믹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공세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부터는 드라마조차 고전하고 있다. OTT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다른 플랫폼들이 비틀거리는 사이 넷플릭스의 독주 체제가 굳어지고 있다.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체제는 늘 그렇듯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경향이 있다. 일극체제가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지만, 그 예술적 한계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한 또 하나의 위기이자 기회가 인공지능(AI)이다. 생성형 AI는 내러티브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아직은 호사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수준이고, 의미 있는 변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창의력을 과신하지 말자. 창조력 또는 영감이라는 낭만주의적인 개념은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다.

AI가 작가를 대체할 수는 없더라도, AI와 작가의 공동작업은 피할 수 없다. 5년 안에 내러티브의 영역에서 AI가 인간을 위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10년이라면? 안심할 수 없다. 20년이라면? 어쩌면 전혀 새로운 내러티브 산업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끝없이 놀라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AI를 통해 내러티브를 즐기다가 욕망의 임계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

대중이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이야기 없는 스펙터클의 세상으로 가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미 전조가 있고, 그것이 현실화된 세상이 어떤 곳일지는 겪어봐야 알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서사의 물줄기에서 종말의 징조가 보이는 시대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내러티브의 아마겟돈에서 어떤 전쟁이 벌어지고, 누가 승리할 것인가. 누군가 승리하기는 할 것인가?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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