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名醫서 전천후 시골 의사로… “나라가 직접 외과 의사 키워라”

김윤덕 선임기자 2023. 7.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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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양정현 상주적십자병원장
수술 2만건 기록을 보유한 유방암 명의 양정현은 “상주적십자병원에 내려와서는 맹장 치질 골절까지 수술하는 전천후 의사가 됐다”며 활짝 웃었다. /신현종 기자

외과 의사 양정현(74)이 경북 상주로 내려온 건 작년 봄이다. 유방암 분야 명의(名醫)로 삼성서울병원 부원장, 건국대병원장을 지낸 그가 서울서 200km 떨어진 상주 적십자병원에 부임한 건 의료계 화제였다. “아직 수술할 힘이 남아 있다면 의사가 태부족한 지방 의료 현장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시골 의사 되기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환자와 질병의 특성이 도시와 판이하고, 수술 환경도 열악했다. “유방암 명의면 뭐 해요? 여기 내려와 내가 가장 수술 많이 하는 분야가 치질이에요 치질. 하하!”

지역 병원이 대한민국 의료의 최전선이라는 그는, “응급실 뺑뺑이 문제는 수십 년 전부터 있었다. 현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 관료들의 반복된 탁상공론이 오늘의 총체적 난국을 가져왔다”고 했다.

◇개한테 물린 환자, 치질 환자

-2021년 9월 건국대병원에서 퇴임했는데, 6개월 만에 일을 재개했더군요.

“제가 놀 줄을 몰라요(웃음). 퇴임은 했는데 남들처럼 노는 방법을 모르니 참 난감하데요. 차라리 개업을 할까 싶어 후배 병원에 가서 관찰도 해봤는데, 종일 환자를 기다려야 하고 어느 땐 공치는 날도 있는 것이 저와는 안 맞더라고요. 밀려오는 환자들을 5분 간격으로 진료하던 대형 병원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겠죠.”

-고향도 아닌데 왜 상주로 오셨나요?

“마침 적십자병원에서 모집 공고를 냈어요. 재정난을 겪는 지역 병원들이 그렇듯 월급이 적고 편의 시설이 없으니 의사들이 얼마 못 있다 떠나는데, 저야 월급은 얼마든 상관없고, 외과 의사 부족한 의료 벽지에서 봉사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지원했지요. 고맙게도 아내가 기꺼이 따라와 줬고요.”

-시골 병원에 적응하기가 어렵진 않았나요?

“일단 목소리가 커야 해요. 대부분 노인 환자라 귀가 잘 안 들려서 진료실은 물론 병원 곳곳이 쩌렁쩌렁합니다(웃음). 뭣보다 상주로 내려와 제가 전천후 의사가 됐지요.”

-전천후 의사라니요?

“유방암, 갑상선암이 제 전공인데 여기선 개한테 물린 환자부터 뱀 지네 진드기에게 물린 환자, 농사 짓다 나무에서 떨어진 환자까지 다 봐야 해요. 어떤 건 30~40년 전 무의촌 봉사 때 실습했던 거라 가물가물해서 다시 책을 찾아 공부할 정도죠(웃음). 제가 상주 내려와 가장 많이 하는 수술이 뭔지 아세요? 치질이에요, 치질, 하하!”

◇아산병원 간호사가 골든타임 놓친 이유

-유방암 전문의가 치질을 수술해도 되나요?

“외과 의사라면 맹장, 치질, 탈장 수술은 기본으로 해야죠. 현대 의학의 맹점이 진료과(科)가 지나치게 세분, 전문화돼 있다는 거예요. 신경외과라도 혈관이냐, 안면이냐, 척추냐로 나뉘고 내과도 소화기내과, 호흡기내과, 심장내과, 류머티스내과 등으로 분류되죠.”

-지나친 분과(分科)가 왜 문제가 됩니까.

“아산병원 간호사가 뇌출혈로 사망한 사건만 해도 그래요. 그 병원에 신경외과 의사가 스무 명이 넘습니다. 그중 뇌혈관 의사는 둘인데 한 명은 휴가, 한 명은 학회에 가서 수술을 못 받았다는 거 아녜요? 그런데 신경외과에 두개골 열 수 있는 의사가 두 명밖에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전공자만 찾다가 골든타임을 놓친 겁니다.”

-환자 처지에선 그 분야 전문의에게 수술받고 싶지 않을까요?

“물론이죠. 그러나 응급 상황은 달라요. 외과 의사는 유방암, 갑상선 수술이 전공이라고 해도 위가 터지고 장이 터져서 오는 환자들 응급 수술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 땐 맹장 수술, 위 수술을 수백 번씩 해본 뒤라야 외과 전문의를 땄어요.”

-대학 병원 정형외과도 팔이냐 다리냐에 따라 의사가 달라지더군요.

“영상의학과 의사들도 자기 전공 아니면 판독을 안 하려고 해요. 폐 전공이면 심장은 못 본다는 식이죠. 그래서 제가 삼성서울병원서 외과 과장을 할 때 위, 맹장, 탈장 수술을 필수로 교육했어요. 그런데 불평이 쏟아지더군요. 이를테면 나는 갑상선 분야의 대가가 될 건데 왜 맹장 수술을 하고 있어야 하냐는 거죠. 지역 병원일수록 몸 전체를 두루 보고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절실한데 큰일입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볼 줄 아는 의료 교육이 필요해요. ”

경북 상주적십자병원 복도엔 지역 화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양정현 원장은 부임 후 낡고 오래된 병원에 이 공간을 직접 만들었다. /신현종 기자

◇지역 병원이 대한민국 의료 최전선

-최근 심장혈관흉부외과 주석중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이 필수 의료 공백의 심각성을 또 한번 절감케 했습니다.

“안타깝죠. 그런 의사 한 분 키워내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까다롭고 위험한 분야인 만큼 지원자도 많지 않죠. 소위 빅5 병원은 수술 공장이라고 보면 돼요. 저만 해도 새벽 6시 반이면 출근해 저녁 7시까지 수술했어요. 집에 돌아오면 밥 한술 뜨고 TV 앞에서 그대로 쓰러져 자고요. 응급 의사들은 더 열악하죠.”

-외과 의사를 더 많이 채용하면 안 될까요?

“결국 인건비죠. 병원이 어쩌다 발생하는 응급 환자를 위해 고비용 전문의를 채용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필수 의료 분야는 수가도 낮아서 병원 수익에 도움이 안 되니 이래저래 기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뉴스가 나올 때마다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해결될까요? 우리나라 의사 수는 선진국에 비해 절대 모자라지 않아요. 의대 정원을 늘리면 피부과 성형외과 같은 비급여·저위험 분야 의사만 양산되지 않겠어요? 전문의 숫자가 아니라 수급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대안이 있을까요?

“국가가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 분야 의사들에 대한 법적·경제적 대우를 파격적으로 지원하는 수밖에 없어요. 일의 양과 스트레스가 많은데 누가 비슷한 대우를 받고 근무하겠어요. 흉부외과 의사가 피부과 동기에게 레이저로 점 빼는 시술을 배워 개업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예요.”

-외국처럼 ‘의사 공유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더군요.

“저도 응급 치료나 필수 의료 분야에서는 겸직 근무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방 의료 현장에도 도움이 되죠. 가령 어느 지역에서 심장 전공의가 개원했다면 적십자병원에서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 그 의사를 부를 수 있는 거죠. 저희 적십자병원만 해도 심장 전공의가 없어요. 대형 병원 의사들에게 인센티브를 많이 주고 지방 병원에서 순환 근무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정부 정책에 달려 있군요.

“지방이 소멸하는 건 지역에 좋은 학교, 좋은 병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카이스트, 포스텍 같은 지역 명문대가 늘고, 각 도(道)에 빅5 수준의 4차 의료 기관을 거점 병원으로 세우면 더 이상 서울로 몰려가지 않아요. 사고가 터질 때만 임시방편으로 정책을 만드니 이 모양 된 거죠. 현재 의료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임상과는 크게 관련 없는 의사인 것도 문제입니다.”

◇청진기 대신 메스 든 ‘칼잡이’

-왜 외과 의사가 됐습니까?

“우리 땐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의료, 그러니까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가 성적 좋은 학생들이 지망하는 메이저 과였어요. 피부과, 성형외과는 인기가 없었죠. 요즘은 대학 병원 톱10 안에 드는 수련의들이 죄다 피부과 성형외과를 지원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내과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내과는 고치는 병도, 못 고치는 병도 없는 과라고 저는 생각했어요(웃음). 고혈압 환자는 평생 약을 달고 살잖아요. 완치라는 게 없죠. 외과는 달라요. 맹장이 터지고 복막염이 와서 배를 움켜쥔 채 응급실로 실려왔는데 수술하고 하루 이틀 지나면 환자가 점점 웃어요. 드라마틱하죠. 그래서 메스냐, 청진기냐 할 때 기꺼이 메스를 들고 칼잡이가 된 겁니다.”

-학원에 초등생 의대반이 생겼다는 뉴스 보셨나요?

“국가 장래를 위해선 바람직하지 않아요. 임상 의사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하는 거고 진짜 뛰어난 인재들은 기초 의학, 화학, 물리학, 공학을 공부해서 대한민국 미래에 기여해야죠. 그래도 꼭 의사가 되고 싶다면 사명감이 앞서야 해요. 장기려 박사나 이태석 신부처럼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 또는 박애 정신. 돈을 위해 의사를 선택했다면 그만큼 실망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큽니다.”

-삼성서울병원 계실 때 이건희 회장을 보셨겠군요.

“의사가 아닌데도 의료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어 인상 깊었어요. 한번은 ‘로봇이 수술을 할 수 있어요?’ 하고 물어 의사들을 당황시켰죠. 그때만 해도 로봇 수술은 생소한 때였으니까요. 암센터를 국내 최초로 세운 것도 그렇고, 뭔가를 목표로 잡으면 무조건 일류로 해야 한다는 의지가 대단했던 분이에요.”

-수필집 ‘의사의 꿈’에 의사는 시혜의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쓰셨더군요.

“베푼다는 의미의 시혜적 태도를 가지면 의사가 환자 위에 군림하게 되니까요. 오히려 환자에게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아요. 환자의 말 한마디를 허투루 들으면 오진하게 되고요. 환자는 의사의 스승입니다.”

-이곳 환자들과는 많이 친해졌나요?

“병원 문을 8시 반이면 연다고 해서 한 30분쯤 늦춰도 되지 않나 했더니 천만의 말씀이었죠. 이분들이 새벽 7시면 벌써 병원 앞에 옹기종기 앉아 계세요. 노인들이라 잠도 없지만, 시골은 버스가 두세 시간에 한 번 다니니 무조건 첫차를 타고 나옵니다. 반대로 진료 받다 말고 벌떡 일어나 나가는 분도 태반이에요. 버스 놓칠까 봐서(웃음).”

-그래도 도시 병원보다는 ‘칼퇴근’ 하는 날이 많지요?

“병원에서 ‘유비무환’은 ‘비 오는 날엔 환자가 없다’는 속어예요. 그런데 상주에 오니 ‘유비유환’이더군요. 비가 오면 농삿일을 할 수 없으니 이때다 하고 몰려오십니다. 이런 날은 눈코 뜰 새 없지요, 하하!”

6월 27일 상주적십자병원에서 만난 양정현 원장. 자전적 수필집 '의사의 꿈'을 펴내기도 한 그는 "의사가 시혜의 태도를 가지면 환자 위에 군림하게 된다"고 했다. /신현종 기자

☞양정현

1949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전주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대병원에서 외과 전문의가 됐다. 국립의료원을 거쳐 1994년 삼성서울병원 개원과 함께 자리를 옮긴 뒤 외과 과장, 부원장을 지냈다. 미국 최초의 암센터가 있는 로즈웰파크기념병원과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 부속 단더레드병원에서 연수했고, 건국대병원 의료원장, 유방암센터장을 지낸 뒤 2021년 은퇴했다. 2만건에 달하는 외과 수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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