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축구의 퍼스트 터치와 킬러 문항

이위재 스포츠부장 2023. 7.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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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 잘 갖춰야 실력도 급성장
축구건 교육이건 다 마찬가지
혜성처럼 나타나는 선수는 없어
기초 교육 충실해야 초일류 탄생

레벨이 다른 리그를 섣불리 비교하긴 조심스럽지만 해외 프로축구 경기를 보다가 한국 축구로 눈을 돌리면 자꾸 눈에 밟히는 차이가 있다. 공을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다루는 기술이다. 패스가 조금만 강하고 불규칙하게 넘어와도 적잖은 한국 선수들은 그 공을 차분하게 자기 앞에 놓질 못하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전엔 트래핑이라 불렀는데, 요즘은 퍼스트 터치란 말을 더 많이 쓴다.

지난달 25일 친선경기에서 공을 컨트롤하는 리오넬 메시. 유럽과 남미 일류 선수들은 공이 오면 몸 앞에 정착시키고 차분하게 다음 플레이를 가져간다. 그런 게 쌓여 팀 전체 실력차를 낳는다. [AP 연합뉴스]

공은 둥글고 계속 구른다. 그 공을 조종하면서 적진을 향해 나아가 상대편 골문 안으로 집어넣는 경기가 축구다. 22명이 7140㎡(축구장 면적) 공간에서 옥신각신한다. 엄청 넓어 보이지만 승부(골)가 갈리는 공간은 주로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 665㎡, 그 안에서 막으려는 수비수와 뚫으려는 공격수가 엉켜 있다. 여기선 퍼스트 터치가 좋지 못하면 그다음 플레이는 볼 것도 없다.

축구에선 공을 갖고 있어야 골을 넣을 수 있다. 공을 갖고 있으려면 공이 자기 몸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면 안 된다. 퍼스트 터치가 서투르면 공을 뺏기고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 이길 수 없다. 현대 축구에서 유행하는 ‘점유율 축구’란 결국 공을 오랫동안 갖고 있어야 골을 넣을 기회가 많아지고 궁극적으로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점유율이 높으면 이길 확률도 높아진다는 점은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퍼스트 터치는 축구를 시작할 때 오랜 시간 연마해야 하는 기본기 중 하나다. 프로 선수가 된 다음, 매일 일촉즉발 승부가 오가는 실전에서 뒤늦게 다듬으려 하면 이미 늦다. 그 퍼스트 터치가 남다른 한국 선수로는 아무래도 손흥민이 돋보인다.

(파주=뉴스1) 민경석 기자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손흥민을 비롯한 선수들이 21일 오전 경기도 파주 축구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2023.3.21/뉴스1

손흥민을 직접 지도한 아버지 손웅정씨는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하며 축구에서 기본이란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에서 출발한다고 믿었다. 그런 기본기는 경기에 나서기 전 반복 훈련을 통해 익혀 놓고 있어야 한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축구도 유소년 단계에서 성패가 갈리지 않는다. 성인 선수가 된 뒤 승부처에서 기량을 극대화하려면 기본기를 미리 장착하고 있어야 한다. 손씨는 “혜성처럼 나타나는 선수는 없다”고 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본기가 그때 발현된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똑같이 밥 먹고 공만 차는 프로페셔널들인데 왜 한국 선수들은 외국 선수들보다 기본기가 떨어질까. 한 전직 축구 감독은 유년 시절 훈련 과정 영향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선수들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실상 ‘프로’다. 축구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계속 그 길을 걷는다. 축구뿐인가. 다른 종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리트 체육’이란 말로 고급스레 포장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직업 선수로 간택해 집중 육성하는 게 한국 스포츠 본질이다.

그런 체계 이면엔 승리 지상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경기에서 이겨야 팀이 존속하고 지원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려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당장 이기는 게 우선이다. 기본기는 짧게 빨리 속성으로 익힌 다음 이기는 법부터 파고든다. 이기기 위해 억지로 하다 보니 선수들도 힘들고 흥미를 쉽게 잃는다. 일부 특정 선수만 혹사시킨다는 부작용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본기 없이 쌓아 올린 실력은 모래성이나 다름 없다. 한 단계 높은 무대에선 통하지 않는다.

스포츠뿐 아니다. 교육계도 비슷하다. ‘킬러 문항’과 ‘사교육 카르텔’이 화제에 올랐지만 그 소동의 본질은 초·중·고 교육과정이 배움이란 긴 과정을 꾸준히 달려갈 수 있는 기본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놓인 결승선(대학 입시)을 남들보다 빨리 통과할 수 있는 요령 습득에 집중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기본기가 부실한 채 문제 풀이형 교육에 몰두하다 보니 창의력 있는 ‘월드클래스’급 인재가 잘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는 게 우리 사회 오랜 고민이었다. 지난해 수학계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가 한국 고교를 자퇴한 학생이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씨는 손흥민에게 기본기를 채우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고 전한다. 그는 “뿌리가 튼튼한 게 먼저고 보이는 위쪽보다 보이지 않는 아래 쪽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위에선 ‘(기본기는 길게 잡아도)3~4년이면 충분한데 (유망주)아들을 망치고 있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결과는 지금 보이는 대로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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