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 더 적게 갖는 민주주의
뭔가 부족하면 자연스럽게
검소해진다는 역설은
우리가 잠깐 망각한 진실이다
이제는 더 적게 갖는 민주주의를
깊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출 문제로 여러 웃지 못할 상황을 보고 기가 다 막히는 궤변들을 듣는다. 수산시장에 가서 갑자기 수조의 물을 떠먹는 돌발 행동은 정부와 여당이 이 문제를 하찮게 여기고 있거나 혹은 사태의 본질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연일 막무가내식 억지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백번 양보해서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해도 그 피해가 크지 않다고 치자. 그러면 이성적으로 차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런 게 없는 것도 문제지만 눈에 띄는 현상은 이 정권 들어서 정권의 실력자들이 너무 자주 화를 낸다는 점이다. 무슨 문화 같다. 아니면 되찾은(?) 권력을 짧게나마 맘껏 누려보고 싶은 집단 무의식인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바다에 사는 생명체들에게 그리고 그 생명체들을 먹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며드는지에 대한 과학적 해설은 차고 넘치니 문외한이 굳이 보탤 말은 없을 것 같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영원히 출렁일 듯한 푸른 바다에 산업 폐기물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무렇지 않게 든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후쿠시마 핵 오염수는 산업 폐기물이다. 녹슬고 휜 철근이나 시멘트 조각이나 석면 파편들이 아니라고 해서 산업 폐기물이 아닌 게 아니다. 도리어 일반 산업 폐기물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다. 산업 폐기물을 아무 데나, 특히 바다에 버려도 되는가?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핵 오염수는 아마 깨끗하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바다에 내버려도 양심이나 마음의 동요가 적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인간은 눈에 보여야 믿을 만큼 매우 시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다는 좀 넓고 깊은가. 버리면 좀 어때. 그것 안고 있느라 돈만 들고 그러는데. 이런 편의성, 경제적 효율성에 입각한 편협한 사고는 향후 넓고도 깊은 바다에 아무것이나 버려도 된다는 인식을 암암리에 퍼뜨릴 것이다. 이것은 다시 우리의 감수성을 비틀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미 우리를 힘들게 하는 기후위기의 대응에 대한 진전된 태도를 방해할 게 분명하다.
다 떠나서, 우리에게 점점 얕아져 가고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껏 쓰고 버리는 일에 너무도 익숙한 시간을 살아왔다. 삶과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쓰고 버리는 것이 없을 수 없지만, 삶과 생활에 필요한 것에 대한 성찰과 돌아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는 그러한 ‘각성’을 무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과연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의 목록은 얼마나 될까. 편리에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편리 자체가 삶 자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편리는 더 많은 편리를 낳는다. 하지만 편리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고 진부함에 중독된 ‘좀비’만 탄생한다.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나라로 유명하다. 모든 나라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코스타리카는 그 필요를 스스로 없앤 것이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잦은 쿠데타가 군대라는 ‘필요’ 때문에 발생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군대를 필요의 목록에서 삭제해 버렸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알려져 있지만, 코스타리카에서는 가난이 발명의 어머니라고 한다는 내용을 오래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코스타리카 사람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졌을 리야 없지만 가난하니까 발명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를 상품으로 구입하는 데 익숙해지다 못해 상품이 필요를 강요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이게 ‘경제성장’의 은폐된 진실이다.
우리는 정말로 전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핵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가 있으니 관성적으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뭔가 부족하면 자연스럽게 검소해진다는 역설은 우리가 잠깐 망각한 진실이다. 사실 후쿠시마 핵 오염수는 가슴 아픈 기억의 산물인데, 이 사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은 엄밀히 말해 2011년의 쓰나미 자체가 아니라 후쿠시마 연안에 자리 잡은 핵 발전소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쓰나미가 근대 기술의 약한 고리(원자로의 디젤 예비 발전기)를 건드려서 일어난 일임을 말이다. 이제는 더 적게 갖는 민주주의를 깊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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