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그 많던 슈퍼들은 어디로 갔을까
요즘 슈퍼 보기가 힘들다. 어딜 봐도 편의점이나 대형마트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무려 일제강점기부터 장사한 슈퍼가 얼마 전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는 1+1이나 마감할인을 이벤트로 정해두고 하지만 슈퍼는 '덤'이나 '에누리'라는 이름으로 아무 때나 한다. 수산, 정육, 채소, 생필품 등으로 파트가 나뉜 대형마트는 크지만 개별적이고 혼밥과 혼술과 담배를 위한 편의점은 24시간 열려 있지만 폐쇄적이다.
도시에서 공동체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공동체로 묶이기 전에 타자와의 관계를 종료한다. 공동체의 탄생과 확산을 막는 것이 오늘날 도시적 삶의 특징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를 '공적 공간'으로 불렀다. 타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회피하는 현대인들이 막상 공동체가 해체되고 사라지자 '위안의 감정, 안락한 소속감'을 그리워하면서 '쇼핑'이라는 공통의 목표와 수단을 통해 공동체적 감각을 잠시나마 복원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타자와의 교류를 성가셔하면서도 고립과 소외에 대한 불안으로 언제나 괴로워한다. 대형마트에서 사람들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카트만 밀고 간다. 쇼핑이 종료되는 순간 일회성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은 다시 일인분의 고독과 소외를 안고 저마다의 암흑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공적 공간이지만 공적인 건 아무것도 없는 완벽한 사적 공간이다.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즐비한 강남은 서울에서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다.
황종권 시인의 산문집 '방울 슈퍼 이야기'를 읽었다. 시인이 나고 자란 1980~90년대 '여수 국동'은 평화롭던 유년기 체험의 유토피아였겠지만 '어른의 세계'에서는 바닷마을이 해양도시로 전환하는 산업화, 도시화의 과도기였다. 1979년 건설된 여수산단이 호황을 누리고 엑스포 개최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대로와 고속철 등 서울식 인프라가 자리잡던 시기다. 도시적 삶이 보편화하면서 여수에서도 점점 '이웃'이라는 말의 온기와 부드러움이 사라져가던 그때 시인의 어머니는 '방울슈퍼'를 열었다. 이 책은 여수의 한 작은 동네 '점빵'인 방울슈퍼를 무대로 개성 넘치는 이웃들이 함께 웃고 울던 세월을 그리고 있다.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슈퍼의 금고를 도둑맞은 시인의 어머니는 울고 불며 발을 구르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끼리 그러면 못쓴다"면서. 시인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억한다. "알면서도 끝내 모른 척하는 것. 이웃을 믿어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슈퍼집 여자가 동네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고.
슈퍼는 그 규모나 형식으로 볼 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와 완전히 대비되는 사적 공간이지만 개인의 내밀한 삶이 '평상' 위에서 공동화하는 진정한 공적 공간이다. 아이가 이불에 오줌 싼 이야기, 화분에 방울토마토가 잔뜩 열린 이야기, 드라마 보다 운 이야기 따위는 사소한 개인사들이지만 웃음과 울음, 때로는 어깨를 다독이는 스킨십 안에서 공유된다. 쇼핑은 핑계다. 고무장갑 사러 갔다가 3시간 앉아 떠들다 온다. 껌 사러 갔다가 막걸리 댓 병 마시고 취한다. 그렇게 '함께 산다'는 감각을 새긴다. 슈퍼가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외롭지 않다.
도시가 그리워하는 공동체의 기억을 슈퍼는 붙들고 있다. 슈퍼가 있던 시절 서울은 도시지만 아직 마을이기도 했다. 골목길에 가득했던 사람의 마음들, 노을이 붉게 물드는 하늘 아래 낮은 담장마다 능소화가 즐겁게 질주하고 가스통 굴러가는 소리가 퍼져가던 여름 저녁이 생생하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이 기성품 아닌 종이박스나 비료포대, 장판 등 개성 넘치는 개인용 썰매를 들고 모여들던 골목길이 그립다. 하루의 고단한 밥벌이를 마친 아버지가 술에 취해 통닭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오던 밤늦은 골목길, 거기 동네를 등대처럼 밝히던 슈퍼가 있었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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