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세치의 혀에 놀아나면 벌어지는 일

이남석 발행인 2023. 7. 9.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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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㉖
선조, 고위 공직자들에 놀아나
섣부른 판단에 아까운 충신 잃어
순신은 소통 통해 장수들에 신뢰

신각이란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한강을 지키던 부원수였다. 그는 왜군이 경상ㆍ충청ㆍ경기 3도를 장악하는 동안 조선 장수 중 내륙에서 승리를 얻은 최초의 인물이다. 1592년 5월 16일 양주전투에서였다. 그런데 신각은 승리를 거둔 지 3일 만에 어명을 받은 선전관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어찌 된 일이었을까.

권력을 가진 이는 측근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용인전투에서 5만 대군이 무너지기 앞서 조선 관군의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 '한성'의 수성대장 이양원,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 그리고 우의정 유홍 등 네 사람이 얽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은 원래 한강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이때 신각은 '배수진'을 펼치자는 주장을 냈으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김명원은 신각의 의견을 무시했다. 신각은 자신의 주장이 안 먹히자 수성대장 이양원을 찾아가 '한강 결사항전'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양원은 벌써 서울을 비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신각은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양주에서 적을 막아 보려고 했다. 양주로 향하던 길에 공교롭게도 이양원과 조우했다. 이양원은 피신을 위해, 신각은 싸우기 위해 양주로 간 것이다. 그 무렵, 한강방어의 책임을 맡은 도원수 김명원은 한가롭게 한강변에서 취흥을 즐기다 왜군이 눈에 띄자마자 만사 제쳐놓고 줄행랑을 쳤다.

신각은 양주에 도착해서 남병사 이혼李渾의 군사들과 합류했다. 신각과 이혼은 노략질하려던 일단의 왜군 부대와 싸워 70급을 베는 성과를 올렸다. 왜군이 경상ㆍ충청ㆍ경기 3도를 장악하는 동안 조선 장수 중 내륙에서 적군을 공격해 승리를 얻은 경우는 신각이 처음이었다.

1592년 5월 16일의 양주전투 기록이다. 그런데 신각이 승리를 거둔 지 3일 만에 개성으로부터 '신각을 베라'는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달려와 그를 죽였다. 양주에서 죽은 왜군의 원수를 조선의 왕이 갚아준 셈이다.

어찌 된 영문일까. 한강에서 달아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은 부원수 신각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짓 장계를 올렸다. 죄를 신각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때 이양원은 자신이 서울 한양성을 버린 사실을 묻어버리기 위해 '낙엽 초식'만 시전할 뿐이었다.

게다가 선조와 함께 개성으로 피난 와서 새로 우의정이 된 유홍은 무조건 신각을 참수해야 한다고 우겨댔다. 선조는 유홍의 주장에 사실 확인 절차도 없이 '죽여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런데 다음날 '양주에서 부원수 신각이 적군을 격파하고 70급을 베었다'는 첩서(전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는 글)가 올라왔다. 당황한 선조는 급히 '취소 통지'를 보냈으나 되돌릴 수 없었다.

무능력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고위 공직자의 삿된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난 안타까운 일이다. 선조는 권력은 있으나 책임감 없는 고위 공직자들의 세치 혀에 놀아난 꼴이 됐다. 상식을 놓쳐버린 최고 지도자의 섣부른 판단은 결국 아까운 충신만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다시 이순신 이야기를 해보자. 당항포해전은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처럼 거의 1시간 만에 승부가 났다. 그 이후는 순신의 조선 수군이 마무리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왜군 패잔병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고, 조선 격군들의 노에 맞아 죽었다. 일부는 갈고리로 끌어 올려져 목이 베이기도 했다. 순신은 적의 함선 25척을 불살라 없애버렸지만 나머지 1척은 도망가도록 남겨뒀다. 날이 저물자 조선 수군연합함대는 당항포 어귀 근처에 정박했다.

다음날인 6월 6일 새벽, 순신은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의 함대를 당항포 입구 쪽으로 보냈다. 왜적 패잔병들이 남겨진 함선 1척을 타고 탈출을 시도할 것으로 훤히 내다봤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100여 명을 태운 적선이 포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매복해 있던 방답첨사 이순신의 함선이 각종 대포를 쏘아대자 적들은 아연실색하면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동쪽에서 나타난 조선 함선이 편전ㆍ유엽전ㆍ철환ㆍ질려포ㆍ대발화 등 여러 무기를 쏘고 던졌다. 질려포는 지금의 수류탄과 같은 폭발탄이다. 그 탄환은 능철, 일명 철질려를 넣은 것이고 대발화라는 것은 속칭 아단단지라는 무기다. 지금의 소이탄과 같다.

이순신이 화포 전문가들과 함께 연구해 발명해낸 것이다. 「충무전서」에 이들 무기가 기록돼 있다. 적선에 탄 왜군 50여명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허우적거렸다. 반파된 적선에 타고 있던 나머지 왜군은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책임감 없는 고위 공직자에게 휘둘렸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당항포해전을 최종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경상우수사 원균,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사 김승룡 등이 이끄는 함선들이 어디선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저마다 바다에 빠져 죽거나 허우적거리는 왜군들을 건져 수급을 베면서 '내 것이니 네 것이니'라며 다퉜다. 이순신 함대와 이억기 함대가 힘을 합쳐 싸우는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승리한 이후에야 순식간에 나타나 숟가락을 얹고 있었다.

적과 함께 싸우던 의리도 이들에겐 없었다. 오직 자신들이 '용감히 싸워서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다'는 장계를 올릴 생각뿐이었다. 순신은 물론 그의 부하 장졸들은 원균의 이같은 행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순신은 대의를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그는 휘하 장졸들과 여러 번에 걸쳐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힘쓰지 말고, 한명이라도 더 사살하는 데 치중하라!"고 지시했다. 한 건의 수급을 확보하는 시간이라면 화살로 10명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베어온 적의 머릿수보다는 사살 숫자에 따라 전공을 평가하고, 이를 그대로 상부에 보고할 것"이라며 휘하 장수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부하 장졸들은 이런 순신에게 믿음을 갖고 그의 지시대로 잘 따랐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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