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하려 골랐는데 ‘썩은 집’…‘집의 품질’ 의무는 없나

심윤지 기자 2023. 7. 9.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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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적합한 주택’ 임대차 기준 법제화 필요성
미국·유럽선 적절한 환기·채광·난방 등 규정 촘촘…미달 땐 임대 불가
한국은 ‘건축 과정’에서만 환경 기준 구체적 명시, 기존 주택엔 미적용
불법건축물 전세사기 피해자는 특별법 구제도 어려워…해결책 시급

생애 첫 독립을 앞둔 A씨(30)는 ‘전세사기’의 타깃이 된 것으로 알려진 신축 빌라를 피해, 서울 종로구의 한 구축 빌라의 반전세계약을 맺었다. 부동산 중개사는 계약서의 주택 상태 항목에 누수 여부 등을 ‘정상’으로 표기했다.

하지만 도배를 하기 위해 벽지와 장판을 떼어내고 보니 온 벽면이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고, 누수가 발생한 흔적도 있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곰팡이는 어느 집에나 있는 것이고, 누수라고 진단한 전문가를 믿을 수 없다”며 수리를 거부했다.

정부가 올 하반기 전세제도 개편을 예고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부동산 하락기마다 되풀이되는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를 막고자 임대인의 상환능력이나 자기책임 부담을 강화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제도 개편 방안은 보증금 채권 반환 등 금융 관점에 집중돼 있다는 한계가 있다. 전문가들은 ‘임대에 적합한 주택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근본적으로 부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윤성진 국토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음식을 파는 식품업체들은 식품위생법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부업체들은 과잉 대부를 금지하는 대부업법의 규제를 받는다”며 “그러나 집을 빌려주고 임대수익을 얻는 행위엔 아무런 규제가 없다”고 했다.

■미국·유럽 “주거 적합 주택만 임대”

윤 부연구위원이 지난달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불법건축물·전세사기 토론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 국가 대부분은 ‘주거하기 적합한 상태의 주택’ 기준을 명문화하고 이에 못 미치는 주택을 임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아일랜드 주택임차인보호위원회(RTB)는 임대주택이 갖춰야 할 최저주거기준을 법적으로 명문화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2019년 개정된 이 기준은 임대주택의 구조적 안전성 확보는 물론, 세입자가 직접 조정할 수 있는 적절한 환기와 난방, 자연채광과 적절한 수준의 인공조명, 해충 및 쥐의 서식 예방, 창문 안전장치 높이까지 촘촘하게 규정했다.

만약 주택 주거환경이 열악해 기준 미달이 의심되면, 세입자는 지역당국에 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는 지방당국 책임으로 규정했다. 임차인의 수리 요청을 ‘합리적 시간’ 내에 수행하지 않아 발생한 비용은 임대인이 부담하도록 했다. 미국서도 비슷한 규정을 담은 통일주택임대차법이 1972년 제정됐다. 임대인은 임대주택을 주거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하며, 위반할 경우 임차인이 차임공제·손해배상·계약해지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현재는 아칸소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주거적합성(Habitability)’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민법에도 ‘적당한 주거지’를 제공해야 할 임대인의 의무를 규정한 조항이 있다. 만약 임대인이 적당한 주거지 제공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임대차 무효 또는 해지를 주장하는 등의 권리 행사도 금지된다.

■불법건축물 임대는 불법이 아니다?

한국 민법에는 프랑스와 유사하게 ‘임대인의 의무’를 규정한 조항이 있다. 임대인은 임차인이 목적물인 주택을 사용·수익할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고(제618조), 임대차 기간 중 그 주택을 사용·수익하는 데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선 의무(제623조)를 져야 한다.

하지만 정작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은 없다. 2020년 국토교통부와 법무부가 발간한 ‘개정 주택임대차보호법 해설집’은 “임대인에게는 주택을 정상적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판단은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는 데 그쳤다.

현행 주거기본법에도 아일랜드와 유사한 ‘최저주거기준’이 마련돼 있다. 최저주거기준이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 면적과 설비, 구조 성능 및 환경 기준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건설단계 인허가에서 주로 활용될 뿐, 주택 임대차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건축법에서도 허가 범위 이상으로 방을 쪼개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방화나 조경 등에 대한 안전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만 적용되고 이미 완공된 건물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불법건축물을 임대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불법이 아닌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임대수익을 극대화하려 ‘작정하고’ 불법건축물을 짓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불법건축물 주차대수 확보나 스프링클러 설치 등 시설투자 비용을 아끼고자 근린생활시설 등을 주거용으로 무단 용도변경하거나, 더 많은 임대료를 받기 위해 호수 쪼개기를 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윤 부연구위원이 건축물대장 전유부를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집합건축물 유형별 위반건축물은 11만382호로 집계됐다. 2015년(8만1277호)부터 7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임대차 기준 공백…피해는 세입자에

임대주택 기준 부재는 결국 세입자들의 주거 취약성을 심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2일 시행된 전세사기 특별법에서도 불법건축물이나 근린생활시설 피해자들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특별법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자는 경매에서 주택을 ‘셀프 낙찰’받아 보증금을 일부라도 회수하거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우선매수권을 넘겨 공공임대 형태로 거주를 유지하는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불법건축물 피해자들은 두 선택지 모두 해당되지 않는다. 경매에서 피해 주택을 낙찰받으려 해도, 불법건축물을 매입하기 위한 이행강제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국토부와 LH는 피해 주택이 불법건축물인 경우 공공임대주택 매입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전세사기 피해자 B씨는 “계약 때만 해도 중개사는 근린생활시설도 1금융권에서 대출이 나올 수 있고, 하자가 있는 주택도 아니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며 “근린생활시설의 위험성에 대해 사전에 확인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모든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월세 제도를 계약자유 및 사적자치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프레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거권은 세입자 일상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능력과 임대 적합 주택의 질적 기준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우리나라처럼 주택 품질 규제를 안 하는 나라에서 ‘불법건축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국가 책임”이라며 “대선 공약 중 하나가 비정상 거처 완전 해소인 만큼, 새로 생기는 건축물뿐 아니라 이미 있는 시설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급한 상황”이라고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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