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소녀’, 그해 여름의 달리기[MD칼럼]
[곽명동의 씨네톡]
그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가 있다. ‘러브레터’는 포근한 겨울에 안성맞춤이고,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낙엽이 지는 가을에 어울린다. 싱그러운 봄에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설레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한 편이 도착했다. 콤 베어리드 감독의 ‘말없는 소녀’는 아무런 말없이 초록의 계절로 스며드는 영화다. 밤바다에 떨어지는 달빛과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숲의 바람이 고요한 침묵 속에 일렁인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가난한 집의 어린 소녀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타는 아이다. 무심하고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도박에 빠져있고, 네 아이를 둔 엄마는 다섯째를 임신 중이다. 부모는 여름 방학 동안 코오트를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맡긴다. 아일린(캐리 크로울리)은 낯선 곳에서 모든게 생소한 코오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숀(앤드류 베넷) 아저씨는 처음엔 무뚝뚝하게 대하다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아일랜드의 여류 작가인 클레어 키건의 중편 소설인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내성적인 소녀가 여름 한 철에 겪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성장 이야기를 깊이 있는 사색과 운치 있는 연출로 담아낸 작품이다. 소녀 시점의 1인칭 현재시제 서사는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 당겨 치유하는 몰입감을 전달한다.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닌 부부와 가족과 학교에서 소외를 느끼는 코오트는 침묵으로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침묵을 거치지 않은 말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말은 침묵 위에 떠있는 밝은 구름 같은 것인데, 그 침묵이 없다면 구름은 사납게 변한다. 극중에서 코오트는 아일린, 숀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가 동네의 어떤 여인 집에 잠시 머무르는데, 그 여인은 정제되지 않은 ‘말’로 코오트에게 충격적 사실을 전하고, 아일린의 마음을 헤집는다. 소녀는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오직 침묵으로 부부를 감싸 안는다.
침묵은 차갑지 않고 따뜻하다. 숀이 목장을 청소할 때 코오트는 말없이 다가가 함께 바닥의 물을 쓸어내린다. 숀은 소녀가 앉아 있는 식탁 위에 한 개의 쿠키를 놓아둔다. 그 ‘말없음’의 행동이 코오트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인다. 둘 사이의 침묵을 가로지르는 것은 소녀의 달리기다. 대문 앞에 배달된 우편물을 가져오는 달리기는 그 어떤 몸짓보다 우호적으로 둘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준다.
침묵은 공감이다. 어떤 말을 통해 아픔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상처를 그대로 놓아두어 시간의 흐름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코오트와 숀, 코오트와 아일린의 침묵 사이에는 제 3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이해와 사랑이 고요하게 흐른다. 그 침묵은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달리기로 승화된다. 이제 부부와 소녀는 침묵을 지키며 그해 여름의 사랑과 우정을 반짝이는 햇빛에 영원히 봉인할 것이다.
[사진 = 슈아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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