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대안인 이주, 그리고 예술
[서울 말고]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수시로 장맛비가 내린다. 비가 그쳐 좋다 싶으면 움직이기 어렵게 덥고 습하다. 곤란한 야외사정은 잊고 지낼 만큼, 미술관 안은 분주하다. 긴 장마를 보내고, 뜨거울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을 초입에 새로 열릴 국제특별전을 꾸리고 있다. 아이디어를 정리해 기획서로 만든다. 스텝들을 모아 전시를 구현한다. 관객들을 만나고 소통한다.
이 간단해 보이는 과정은 전시마다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새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느낌이다. 작가도 작품도 스텝도 실행업체도 바뀌고, 그에 따라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달라진 기획과 여건에 나를 맞춰가는 일, 어디까지 타인의 영역을 허락하고 유연해질 수 있는지 실험하는 일, 개인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좁은 시각의 기획이 수많은 이들과 협업을 거치며 어디까지 확장돼 나가는지 지켜보는 일은, 대체로 즐겁다.
이번 국제특별전은 지난 비엔날레에서 실패한, 제주인력으로 국제전시 구현하기를 실험해보는 장이다. 비엔날레의 절반도 안 되는 예산으로 국제전을 하되, 참여인력을 모두 제주에 있는 전문가들로 꾸려본다. 굳이 일하는 데 있어 제주에 있는 인력이라는 편협한 지역성을 내세우는 게 역차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전시를 개최하는 노하우가 이 지역 안에 쌓여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본다. 지금 이 전시를 함께한 이들이 나중에는 제주비엔날레도 하고, 광주비엔날레도 하고, 베니스비엔날레도 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다.
9월19일 개최될 예정인 이번 전시 주제는 이주와 생존이다. 전시명은 <이주하는 인간-호모 미그라티오>. 백남준, 최우람, 곽선경, 박지현처럼 한국인임을 초월해 전지구적으로 활동한 작가들의 대형프로젝트가 있고, 아키 이노마타, 클라라 청같이 외국인이면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직접 제주를 리서치한 신작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작가들은 제주 출신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양화선, 오봉준, 고닥은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고향이 제주인 이주작가다. 제주에서 활동하며 이주 자체를 주제로 작업을 계속해 온 이지유, 김옥선, 박정근의 작품도 깊이 있다. 현우민은 재일교포 3세이고, 새미 리, 케이트 배는 재미교포다.
이 전시를 기획하는 데 길라잡이 역할을 한 소니아 샤의 책 <인류, 이주, 생존>은 이동과 이주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본능임을 강조한다. 식물, 동물, 인간의 이주 사례를 과학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들려준다. 이주는 불편함도 위기도 아니고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고, 위기의 시대에 유일한 대안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살아가기 위해 모든 생명체는 항상 움직였고 움직일 것을 말한다.
이주의 이유는 다양하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다.), 문화적인 여건을 찾아 자발적으로, 생태적인 이유로 적합한 환경을 찾아, 우발적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이동한 경우까지, 총 4개의 섹션으로 전시는 이주의 이유를 찾았다. 이주의 기록을 추적하다 보니,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일들, 흩어지고 다시 뭉쳐지는 일들, 변화하고 적응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은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매일을 살아내고 이겨내고 극복하는 방법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매체를 넘거나, 공간을 넘거나, 종을 넘나들고, 생존 가능한 기후를 찾고, 집을 짓고 살 땅을 찾고, 한계를 극복하고 이동해서 결국은 대안을 찾아내 살아남은 이야기를 작가들의 작품을 경유해 들여다보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이주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미지에 대한 상상력과 인간 능력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지구를 구하는 생존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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