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과 허영심이 공존하는 물건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내가 누군지 알아?’
굽신거림과 모셔짐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드라마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셀레브리티>라는 한국 드라마에서 ‘나 누군지 몰라요?’란 대사가 여러 번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질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뉘앙스가 깔려있었다.
<셀레브리티>는 패션에 대한 눈썰미와 취향, 그리고 자신의 우아한 일상을 촬영하여 개인미디어에 올려 보여주고, 인기도 얻고 돈도 버는 셀럽(유명인)의 세계를 다룬다. 그 세계에서는 반짝 인정받는 것이 평생에 걸쳐 쌓아가는 신뢰보다 훨씬 값지게 여겨지는 듯하다. 셀럽들은 네티즌에게 동조와 동경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데, 그러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 한정판 명품처럼 되어야 후광효과가 있고 호소력이 생긴다. 그러니, ‘나 몰라요?’라는 질문에는 ‘명품 못 알아봐요? 내가 곧 명품인데’라는 비아냥거림이 깃들어 있다.
상류층의 라이프스타일을 샅샅이 들여다볼 기회는 평범한 우리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의 명품 브랜드들이 있기에, 그 제품을 쓰는 부류의 모습을 언제고 상상해볼 수는 있다. 셀럽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상류층의 취향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통장을 탈탈 털어 그들을 따라 해보면 상류층의 삶도 잠시 걸쳐 입고 흉내 낼 수 있다.
요즘만 그런 셀럽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문화가 싹트던 18세기의 유럽에서도 당대 유행하는 고급스러운 상품들을 은근슬쩍 그림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를 ‘tableau de modes(유행 그림)’라고 불렀다. 한 예로 루이 15세 통치기의 프랑스 궁정화가 프랑수아 부셰(1703~1770)가 그린 <식사시간>을 보자. 이 그림의 감상 포인트는 물건들에 있는데, 반드시 18세기의 시선으로 봐야 한다.
부유한 저택에서 귀족 집안의 젊은 부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벽시계는 8시를 가리키는데, 흔해 빠진 벽시계처럼 보이겠지만, 당시에 이런 벽시계를 집에 걸어놓는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오늘날 승용차 1대 가격이라고 해야 할까. 아침 8시라는 시간도 의미심장하다. 평민들은 규칙적으로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느지막하게 아침 겸 점심을 먹었던 반면, 귀족들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산책이나 독서를 했기 때문이다.
응접실에 두 여자, 두 아이, 집사 한 사람이 있는데, 이들이 마시려는 음료는 1730~40년대에는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었던 커피와 코코아이다. 귀부인들이 내민 티스푼을 눈여겨보시라. 집사가 들고 있는 은주전자는 또 어떤가. 중국풍의 칠기 탁자와 그 위에 놓인 도자기 그릇은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여인이 손에 두른 팔찌, 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인형과 목마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허술한 것 없이 모두 명품이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개인미디어 속 연출사진처럼 신중하게 선별된 물건들이다.
그림의 중앙을 커다랗게 차지하는 것은 출입문을 비추는 대형 거울이다. 거울은 자기애와 허영심을, 문은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는 경계를 상징한다. 부셰의 그림은 고상한 삶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관람자를 인도한다. 문밖에는 어쩌면 비루하거나 혼란스러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림 속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명품은 럭셔리(luxury)의 번역어이다. 만일 럭셔리를 사치품이라고 번역했더라면 ‘허영’의 인상이 부각될 텐데, 명품이라고 부르니 ‘동경’한다는 뉘앙스가 훨씬 강하다. <럭셔리>를 저술한 맥닐(P.McNeil)과 리엘로(G.Riello)에 의하면, 럭셔리는 희귀하고, 고풍스러우며, 시간을 초월하는, 지극히 좋은 무언가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지극히 좋은 것은 쉽게 질리지 않고, 버려지지 않으므로 불멸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럭셔리를 지상낙원에서 누릴 수 있는 궁극의 행복과 연결짓기도 했다.
럭셔리에 사치스럽다는 뜻이 덧대어진 것은 고대 로마에 이르러서다. 광채라는 뜻의 원어 luxus와 그것에서 파생한, 과잉을 뜻하는 단어 luxuria가 혼용해서 쓰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저술가 키케로는 럭셔리는 탐욕을 부추겨 악행에 이르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셀레브리티>의 결말도 키케로의 언급대로 흘러간다. 명품에 대한 자부심과 허영심이 거짓과 질시로 번지다가 결국엔 파멸로 주요 등장인물들을 몰고 간다. 부셰가 열린 문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했었는데,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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