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그릇만 키워주면 스스로 자라는 게 아이들…거짓말·험담 빼고 다하게 해줘야"

이혜인/강영연 2023. 7. 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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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예산이 남았다는 건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현상을 겨우 유지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저것 도입하다 보면 오히려 더 모자랄 때가 많지요."

지난 6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과의 대담에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교육 예산이 남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대담 내내 김 교수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른들이 만든 틀에 아이들을 맞추려 하지 말고 생각의 그릇을 키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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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예산이 남았다는 건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현상을 겨우 유지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저것 도입하다 보면 오히려 더 모자랄 때가 많지요.”

지난 6일 임태희 경기도교육감과의 대담에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교육 예산이 남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취임 1주년을 맞은 임 교육감이 103세 철학자인 김 교수를 만났다.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철학자에게 새로운 교육의 길을 묻기 위해서다.

대담 내내 김 교수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른들이 만든 틀에 아이들을 맞추려 하지 말고 생각의 그릇을 키워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아이들의 그릇만 키워주면 스스로 채워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임태희 교육감=103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김형석 교수=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나빴어요.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많았죠. 술, 담배도 안 하고, 자는 시간도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보고, 주변에 백세쯤 산 사람들을 살펴보니까 특별히 건강했던 사람도 없고 건강 걱정 많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인생을 편안히 산 사람이 더 많이 살지 않나 싶어요. 건강의 비결이 뭐냐고 많이 물어보는데, 열심히 일하는 삶이었던 것 같아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이 따라오더라고요.

▶임 교육감=일을 위해서 평소 규칙적으로 자기 관리하면서 일에 집중하면 건강은 따라온다는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학교 다니실 때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이셨나요.

▶김 교수=특별히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 시인이 같은 반 친구였고, 황순원 소설가가 선배였어요. 그 둘을 보면서 ‘나도 내 인생 60대 때까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중학교 3학년에 되면서 철학을 공부해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독서를 많이 했죠. 학과목보다는 종교, 철학, 문학 분야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것이 학교 못지않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중고등학생 가운데 책을 가장 많이 읽은 편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임 교육감=부모님들께서 학교 공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씀은 안 하셨나요.

▶김 교수=부모님이 옛날 분이세요.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으셨죠. 학교 가기 전까지는 저 역시 배운 게 없었죠. 학교에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하면서 많이 배웠죠. 특히 당시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선배였던 조만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마음의 그릇이 커진 것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 독서를 하기 시작하니까 그 그릇이 채워졌어요. 가정에서 혜택을 못 받았지만 선입견이 없어서 오히려 스스로 나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했다면 이렇게 못 자랐을 것 같아요. 그래서 환경이 나쁜 게 인생에서 꼭 나쁜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인생의 주어진 여건은 비교적 공정해요.


▶임 교육감=마음의 그릇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 교육에서도 시험 보는 기술이 아니고 생각의 그릇, 생각의 크기와 깊이를 더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하려면 혼자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줘야 하는데요. 학교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교수=한국전쟁 당시 백낙준 선생이 문교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분이 미국 정부에 한국 선생님들의 교육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한국 교육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선생님들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미국 정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중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등 5명을 모아서 한국으로 보냈어요. 제가 그때 중앙중고 교감이어서 이들을 만났었죠. 참 많이 배웠습니다. 가장 큰 배움은 선생과 제자, 부모와 자식 간의 상하관계를 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를 위한 스승이 되고, 자녀를 위한 부모가 되지 않는 한 교육을 못 바꾼다는 거예요. 지금은 이 부분은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이 있는 교육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겁니다. 시설이나 제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교육에 사랑이 기반이 돼야 해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말 안 듣는 학생을 어떻게 지도하냐고 했을 때 미국 담당자들의 반응이었어요. 그런 학생을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바로 그런 학생이었다고요.

▶임 교육감=교육을 통해 사람이 바뀌고,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씀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된 것 같습니다.

▶김 교수=학부모들이 욕심이 많아서 내가 키우고 싶은 대로 키우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는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게 많지만, 미국에서는 딱 두 가지만 하지 말라고 해요. 거짓말, 그리고 다른 사람 험담이요. 대신 뒤처진 아이들도 끌어올려 주려고 해요. 한번은 미국 사는 손주를 오랜만에 봤는데 달리기 상을 받았다고 자랑하더라고요. 맨날 꼴등을 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상을 받았는지 보니까 ‘제일 열심히 뛴 상’을 받았다는 거예요. 담임 선생님이 아이가 열등감이 생길까 봐 준거죠. 키 작고 체력도 약하던 아이가 예일 대학에 가서 요트 대표선수가 됐어요. 학교 졸업하고는 의사가 됐고, 교수도 했고요. 한국에 가서 키웠으면 가능했을까요. 아닐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자부심을 키워주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 교육감=학생들이 더 잘하는 걸 하게 하고, 기죽게 하지 않고 하는 미국 교육 방식을 말씀해주셨는데요. 교육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어느 시절이 제일 중요할까요.

▶김 교수=선생님으로 초등학교에 대학까지 있어 봤는데요. 선생님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가 아닌 것 같아도, 학생들은 그 선생님들만큼 자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입니다. 선생님들이 자라지 못하면 그 밑 학생들도 자라지 못하는 겁니다. ‘제자들을 키우고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키워야겠다’, ‘내가 성장하는 그만큼 내 제자들이 성장하게 도와야겠다’ 그런 생각 하는 게 선생님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한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찾아왔어요. 친구들보다 성공하지도 못한 것 같다면서 직업을 바꿔야 할까 고민하더라고요. 바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정치도, 경제도 아니고 교육이라고요. 특히 초등학교 교육은 전 국민 교육이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당신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했죠.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어디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 중요합니다. 한국 선생님들이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좋은 회사 다닌다는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교육자로서 내 인생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나랑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대학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또 그것도 보람이 있어요. 내가 자라는 것만큼 제자들도 자라게 해주는 게 교육자의 삶이 의미가 있는 이유죠.


▶임 교육감=학령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학생들이 각자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야 할 때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도리어 학생이 감소한 만큼 교육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곤 하는데요.

▶김 교수=학생들은 끝없이 자라나기 때문에 행정의 그릇에 가두어선 안 됩니다. 후진국은 제도를 먼저 만들고 교육을 그 틀에 맞추지만 선진국에서는 교육을 행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지요. 교육은 개인의 인격적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목적’ 그 자체가 돼야 합니다. 교육 예산이 남았다는 건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현상을 겨우 유지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저것 도입하다 보면 오히려 더 모자랄 때가 많지요.

▶임 교육감=아이들은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요?

▶김 교수=미국 대학들은 학교마다의 개성을 인정해요. 미국 시카고대는 3 학기제를 운영해 1년 중 한 달은 전공과목을 색다르게 공부합니다. 프랑스어 전공 학생들은 직접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식이에요. 한국 학교들도 특색을 갖췄으면 좋겠어요.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는 체제도 마련됐으면 좋겠고요. 인성 교육에도 힘써야 해요. 학창 시절에는 친구를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능력을 반드시 키워줘야 합니다. 이건 남은 일생 계속 필요한 거거든요. 몇 마디만 해보면 이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렸는지 다 느끼게 돼 있어요. 어른이 돼서도 선한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임 교육감=최근 불거진 학교폭력 문제를 보면, 아이들 인성 교육에 학부모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김 교수=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학교폭력 문제가 대두됐을 때 조사를 해보니 중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해 본 학생들은 사고를 내지 않더라는 겁니다. 봉사 경험이 인성의 영역에 깊게 관여한다는 뜻이에요. 미국 대학들이 입시 과정에서 봉사 경험을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한국도 중·고교에 봉사 활동제를 도입했지만, 결과는 ‘실패’였어요. 학부모들이 대신 해줬거든요. 어머니가 아이 대신 가서 봉사 점수를 따왔어요. 인성 교육에 학교뿐만 아니라 학부모도 함께 뜻을 모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임 교육감=조기 교육 현상도 점점 심화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예전 라디오 방송에 교수들이 나와 “자녀들 일찌감치 천재로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정해진 성장 단계가 있어요. 처음에는 모방하다가 기억력을 발전시키고, 그다음 사고력이 커요. 근데 요즘에는 모방하는 단계부터 경쟁시켜요. 위험한 생각이죠. 아이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영어 교육을 들이미는 것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임 교육감=마지막으로 교육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김 교수=‘나만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곧장 사라지고 말지요. 나를 공동체, 민족, 국가와 더불어 키워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내가 자라는 것만큼 교육, 공동체, 나라가 자란다는 생각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임 교육감=선생님 말씀처럼 ‘사랑이 있는’ 교육 현장이 되도록 교육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혜인/강영연 기자 he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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