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보단 반공? ‘역사전쟁’ 나선 정부·여당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역사 전쟁’에 나서고 있다. 당정은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의 야당 겨냥 ‘반국가세력’ ‘국가정체성 부정 세력’ 발언 후부터 백선엽 장군 친일 행적 지우기,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지원 등의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이른바 ‘국가정체성 바로 세우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 전 대통령과 백 장군을 우상시하는 극우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있다. 두 사람의 행적이 미화되고 여권이 더욱 보수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9일 정치권에 따르면 정부·여당 인사들이 백 장군과 이 전 대통령 치켜우세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7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에게 친일파 낙인을 찍어 모욕하는 것이 우리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니다”라며 백 장군이 월북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보다 높게 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3일 SNS에서는 “항일운동했다고 무조건 OK가 아니다”라며 “북한 김일성 정권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받아들일 국민이 누가 있겠나. 이는 자유대한민국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보훈 메시지 차원에서 독립운동보다 반공의 가치를 더 인정해줘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백 장군 친일 행적 지우기에도 나섰다. 박 장관은 지난 6일 CBS라디오에서 “백 장군은 친일파가 아니다.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며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보훈부는 백 장군 등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표현을 삭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의힘도 지난 5일 백 장군 3주기 추모식 겸 동상 제막식 총출동해 백 장군의 공적을 강조하는 데 힘을 보탰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건국의 아버지셨다면, 백선엽은 건군의 아버지셨다”고 강조했다. 윤 원내대표는 2020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백 장군의 친일 기록 기재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백경훈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은 지난 8일 논평에서 “문재인 정부 시절,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 친일파 문구를 넣는 과정에 국방부가 동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백 장군의 친일 행적 기재에 동의한 당시 국방부를 비판했다.
이 전 대통령 띄우기도 한창이다. 지난달 28일 발족한 ‘이승만대통령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는 민관 합동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 전 대통령의 정치사상과 업적을 기리겠다는 취지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달 29일 SNS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발족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리고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과 공정한 법치를 다시 바로 세우길 바란다”고 밝혔다.
정부·여당의 역사전쟁은 지난달 28일 윤 대통령의 발언 이후 더욱 강해지는 모양새이다. 윤 대통령은 같은 날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행사에 참석해 야당과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우리는 올바른 역사관, 책임 있는 국가관, 명확한 안보관을 가져야 한다”며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들은 북한 공산집단에 대해 유엔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 제재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또 “허위 선동과 조작,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 전 대통령과 백 장군에 대한 역사 왜곡이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는 백 장군이 만주국 군대의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세력을 탄압한 이력을 들어 그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그는 1943년 2월부터 광복 이전까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백 장군이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는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며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썼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일 당 정책조정회의에서 “박 장관은 호국을 이유로 백선엽의 친일행적을 지우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여권의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는 그가 종신집권을 노리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사실이 종종 생략된다. 백 장군과 당시 이 전 대통령의 자유당이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수집한 1956년 제3대 대선 당시 미국 정보보고서에는 백 장군에 대해 “그의 부관들에게 정부·여당 후보들에게 투표할 것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고됐다. 주요 지휘관들 가운데 자유당의 지령에 따라 그처럼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이 확인된 것은 그가 유일하다”고 기록돼있다.
국민의힘의 강경 보수화도 우려된다. 이 전 대통령·백 장군 우상화는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주장과 겹친다. 전 목사는 지난달 27일 한 방송에서 “백선엽 장군의 장례식을 새로 해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목사는 또 광화문광장을 이승만광장으로 부르자고 주장해왔다.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을 지낸 신인규 국민의힘 정당바로세우기 대표는 이날 기자와 통화하며 “국민의힘이 개혁이라는 가치를 상실하고 과거로 퇴행하는 것 같다”며 “역사는 역사로 남겨야지 역사에 대한 논쟁을 자꾸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이날 “전 세계적으로 국가주의 바람이 부는데 윤 대통령도 국정운영의 기본 핵심축 중 하나를 국가주의로 설정을 하는 것”이라며 “균형을 잡아 왔던 좌파 진영의 도덕성 위기, 중도의 위축 등이 겹치면서 정부·여당의 ‘보수 드라이브’가 먹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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