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욤 피지 연출 "한국에서 신작 공연 안달 난 기분"[문화人터뷰]
[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이번에 한국 관객을 만나 더 신난 건 새로운 공연이었기 때문이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난 기분이랄까요. 첫 아이는 이미 선보였고, 둘째 아이를 자랑하는 기분이었죠."
'네이처 오브 포겟팅'으로 2019년 처음 내한한 영국의 피지컬 시어터 극단 '시어터 리'가 신작 '버스(BIRTH)'로 한국 관객들을 만났다. '버스'는 2019년 런던 국제 마임 축제에서 첫선을 보이고 같은 해 에든버러 축제에서 "아름답고 황홀한 작품", "강력하고 고동치는 75분" 등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이번 한국 공연이 첫 해외 투어였다.
최근 서울 성동구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만난 기욤 피지 연출은 "우리는 공연마다 관객들을 탐험과 여정에 초대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게 주 목표죠. 이 공연 역시 관객들이 각자 경험에 따라 어떻게 느끼고 공감하는지가 중요해요."
이야기는 한 집안의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임신 8개월 차인 에밀리가 우연히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게 되며 시작된다. 할머니 수, 어머니 캐서린, 손녀 에밀리로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가족의 역사와 슬픔 등 삶의 여정을 그려낸다.
기욤 피지 연출은 "우리의 첫 질문은 '기억은 언제 시작되는가'였다. 이미 알고는 있지만 배우지 않은 것들이 있고, 거기서부터 출발했다"고 말했다.
"유전적 기억의 개념으로 접근했는데 성과가 없었고, 심리학 분야를 탐구하던 중 심리계보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가계도를 살펴보며 비슷한 일이나 같은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찾고자 했죠. 놀랍게도 상당수 가족 안에서 아이를 잃는 사건(유산)이 있었고, 공통되지만 잘 이야기되지 않는 가족의 비밀에 집중하게 됐죠."
약 15개월간 유산을 경험한 가족들을 비롯해 신경과학자 및 철학자 등 전문가와 만나며, 그 과정을 통해 가족의 기억과 경험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했다. 작품은 한 아이가 탄생하고 성장하며 사랑하고 결혼해 임신하는, 반복되는 삶을 보여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무엇이 전해지는가'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인 연극과는 다르다. 2011년부터 런던에 기반을 두고 활동해 온 시어터 리는 주로 역동적이고 섬세한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작품을 선보여왔다. 인간의 연약한 상태를 마임, 연극, 음악 등을 활용해 표현한다. 기욤 피지 연출은 "몸이 공연의 주요 도구가 되지만, 우리는 무대 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활용한다"고 했다.
'버스' 무대엔 대형 탁자와 의자만이 놓여있다. 그 위로 물결처럼 휘날리는 대형 천은 장면을 수시로 전환하고, 소품이 되거나 극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천을 처음 가져왔을 땐 딱히 정해놓은 게 없었어요. 놀면서 동작을 취하고, 하나씩 발견해 갔죠. 공연에선 탁자보나 침대보가 되기도 하고,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도 같죠. 시간이 지나가는 표현이나 여성이 출산할 때 진통을 표현하기도 해요."
대형 천을 쓴 건 '현대 마임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 마임 아티스트 에티엔 드크루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1950년대 그의 공연에서 엄청나게 큰 천을 활용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 데서 착안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런던 국제 마임 학교 등을 졸업하고 시어터 리를 설립한 기욤 피지는 연출이자 배우로 활동하며 에티엔 드크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음악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감성적인 선율을 선사한다. 파도 같은 천의 움직임을 반영한 피아노 아르페지오 선율이 이어지고, 바이올린은 긴장감과 입체감을 더한다. 작곡을 맡은 알렉스 저드 음악감독은 "음악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여정을 함께한다. 관객들이 배우들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공연 중 똑같은 멜로디가 다양한 버전으로 연주되죠. 멜로디 중 하나는 한 배우의 부모님이 불렀던 자장가예요. 그 자장가가 세대에 걸쳐 그대로 내려온다는 점에서 음악적 모티브를 얻었어요. 또 하얀색 천이 밀물과 썰물처럼 휘어지는데, 그 움직임에 맞춰 연주하죠."
연주를 하는 음악감독은 객석 맨 앞자리 중심에 위치해 관객들과 같은 시선 속에 있다. "오페라 공연에서 피트에 지휘자가 있는 것처럼 음악으로 무대 위 배우들을 지휘하는 느낌이죠."
이번 작품은 물론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삶을 그린 '네이처 오브 포겟팅'까지 삶의 순환과 소중함을 담아낸다. 기욤 피지 연출은 "결국 삶의 연약함과 불확실성 그리고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두 작품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호평을 받은 만큼 다음 작품도 궁금해진다. 한국에 또 소개해 주고 싶은 공연을 묻자, 그는 "전부 다"라고 웃으며 지난해 초연한 '블루벨(BLUEBELLE)'을 꼽았다.
"한국 관객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연이에요. 유럽의 전통 설화(동화)에 기반을 둔 이야기죠. 부모님의 사랑과 우리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어떻게 돌보는지 등의 내용이에요. 좀더 개발해 투어할 예정이죠."
12년 역사를 써온 시어터 리의 정체성을 담은 공연도 개발 중이라고 귀띔했다. 테드 강연과 비슷한 공연이란다. "우리가 왜 공연하는가에 관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그동안 많은 공연과 투어를 다녔는데 약간의 쉼을 가지며 우리가 이 일을 왜 하고, 이 일이 왜 중요한지 다루죠."
☞공감언론 뉴시스 aka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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