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희귀질환 고액 실비 지급 거절 늘 것…" 시름 깊어진 의사·환자들
환자들 "환자 정보 악용해 지급 거절 명분만 쌓일 것"
의료계 "비급여 청구 기각→ 진료 위축→수익 감소"
금융·보건 당국 "간소화도 의료계와의 협의도 필요"
'실비(실손보험금)' 청구 과정을 간소화하자는 내용의 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이 지난달 15일 국회 정무위원회(이하 정무위)를 통과하면서 입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법안에 대한 금융당국과 의사·환자 단체 간의 이해 충돌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 법안이 무엇이고, 왜 이해 충돌이 일어난 걸까?
실손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비급여 의료비를 보장해준다는 장점 때문에 우리 국민 3574만 명(지난해 9월 기준)이 가입해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도 불린다.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려면 환자가 먼저 진료비를 지불한 후 요양기관(병원)으로부터 영수증·진단서·진료비세부내역서 등을 떼야 했다. 그리고선 보험사에 보험금 청구서류와 함께 직접 제출하거나 이메일, 모바일 앱 등을 통해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청구 방식이 번거로워 청구할 금액이 소액이면 보험금 청구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뉴시스에 따르면 병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는 점이 번거로워서 신청하지 않았던 소액 보험금 규모가 연간 3000억원 규모에 달한다.
이에 보험금 청구 절차 간소화 내용을 담아 발의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은 보험금 청구를 위한 종이 서류를 전자서류로 대체하자는 게 골자다. 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병원에 요청하면, 병원은 해당 자료를 전산망을 통해 '제3의 중계기관'을 통해 보험사로 전송하는 식이다. 중계기관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으로 결론 난 상태다. 당초 중계기관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거론됐지만 '심평원이 민간 사기업 영역에 활용되는 게 맞지 않는다'는 보건복지부의 반발로 최근엔 '보험개발원'이 유력한 중계기관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의료계와 환자단체는 환자의 진료세부내역서 같은 의무기록이 전자 문서 형식으로 중계기관에 모이면 영리기업인 보험사가 환자의 민감한 정보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 7일 대한의사협회가 주최해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열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위한 바람직한 방향 토론회'에서 서인석 대한병원협회 보험이사는 "그간 대다수 보험사는 인건비 등의 문제로 진료비세부내역서를 전자 문서로 전환하기가 어려웠다"며 "하지만 전자화를 거치면 진료비세부내역에 포함된 의료행위, 약제, 치료재료가 환자 개개인 단위로 관리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고액의 진료비를 청구할 환자에게 '지급 거절'의 명분으로 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보험사에 '통제권'이라는 막강한 칼자루를 쥐여줘 보험사의 이익은 배를 불리면서 환자뿐 아니라 의료계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이란 우려에서다.
병원·약국의 수익 저하에 대한 우려도 이들이 이 법안을 반대하는 이유로 꼽힌다. 의료계는 비급여 항목으로 병원의 수익을 창출·보전해왔는데, 보험사의 통제권이 강해져 환자들의 비급여 항목 청구가 이런저런 이유로 기각되면 점차 비급여 항목을 환자들이 원치 않게 되고, 그에 따라 병원 내 수익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럴 경우 예컨대 비급여 항목이 주를 이루는 '신약'을 원하는 암 환자는 비급여 항목에 대해 청구해도 보험금을 못 받을 사실을 알면 막대한 약값을 치를 수 없어 신약을 포기하는 사태가 줄을 이을 것이란 것이다.
비교적 고액 청구가 많은 중증질환 환자와 그 가족들도 이런 우려에 동조하고 있다. 안상호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이사는 "보험업계는 그간 '가입자들이 청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을 막겠다'며 환자들의 편익 증대를 명분 삼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요구해왔다"며 말문을 뗐다. 그러면서도 안 이사는 "하지만 처방받은 고액의 경구용 표적항암제에 대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고, 이미 지급한 보험금도 반환하라는 소송으로 말기 암 환자와 가족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등 고액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비윤리적, 반인권적 행태를 보여왔다"고 날을 세웠다.
안 이사는 "환자들이 바라는 건 중증 질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액 의료비에 대한 보험금 지급이 거절당하지 않는 것이지, 포기해도 그만인 소액 의료비에 대한 보험금이 아니다"며 "보험사가 수집한 청구 자료를 보험사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고 고양이가 먹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암·희귀질환 같은 중증 질환의 치료비가 대부분 고액인데, 보험사가 환자 정보를 전산화해 데이터를 쌓으면 향후 고액 청구 시 지급하지 않으려는 명분으로 삼을 것이란 우려를 표한 것이다.
반면 금융·보건 당국은 이 법안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신상훈 금융위원회 보험과장은 "모든 환자의 의료 데이터가 무조건 전산을 통해 보험사에게 다 가는 건 아니다"라면서 "보험 계약자가 실손 청구 목적으로 요청할 경우에만 간다"고 반박했다. 이어 "의료계와 보험사가 위원회를 만들어 (보험사에)보낼 데이터를 협의를 거쳐 표준화하면 개선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임혜성 보건복지부 필수의료총괄과장은 "국민 편의를 위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서도 "이해관계에 있는 의료계의 의견을 잘 반영해 이 법안이 잘 안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입법화하면 의료계는 '보이콧'하겠다는 로드맵을 세웠다. 이정근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은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의료계는 환자의 의료 정보 전송을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심교 기자 simky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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