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에서 염소로 새마을 운동합니다”
구미역 뒤편서 12년째 무료 급식 봉사
기부금 안 받고 자비로 급식비 마련
2010년부터 라오스 초등학교 3개 지어줘
“죽을 때까지 봉사·기부가 꿈”
(사)대한민국 서포터즈 봉사단을 이끌고 있는 최병식(70) 혜원자원 대표는 집이 없다. 워낙 기부와 봉사를 많이 하는 까닭이다. 12년째 구미역 뒤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어르신들에게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있지만 후원을 10원도 받지 않는다. 다만 쌀기부는 조금씩 받고 있다. 혜원자원에서 올라오는 수익의 25%를 봉사에 쓴다. 그의 봉사활동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라오스에 초등학교 3채를 지었다. 2011년 9월21일 '혜원초등학교'를 개교시켰고, 2012년에 '삼문초등학교', 2017년에 '예스구미초등학교'를 지었다.
"중고 패널? 대한민국의 위신이 있는데...“
'해외 진출'의 계기가 있었다. 2010년 즈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분이 중고 패널을 구할 수 없느냐고 문의를 해왔다.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묻자 초등학교를 짓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미 법승사에서 추진하는 학교 지어주기 사업이었다. 이에 최 대표는 "대한민국의 위신이 있는데 중고를 써서 되겠는가. 내가 새 것으로 구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게 라오스에 학교 지어주기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것도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라오스에서 "학교를 지어주신 분이 오지 않으면 규정상 개교를 할 수 없다. 꼭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거절했더니 "여긴 공산주의 국가라서 규정을 어기면 절대로 개교 못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개교식에 참석했다.
라오스 측에서 최 회장을 고집스레 초대한 이유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그 지역의 도지사쯤 되는 고위관료가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회장님, 학교가 하나 더 필요합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최 회장은 흔쾌히 그럽시다, 하고 대답했다. 요청에 응한 정도가 아니었다. 기대 이상의 기부로 화답했다. 이번에는 패널이 아니라 더 오래가는 벽돌로 지었다. 이를 위해 노후 대비 자금으로 모아둔 적금을 깼다. 라오스 측에서는 "나라에서 학교를 지어주는 경우는 있어도 최 회장님처럼 개인이 나서서 이런 일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학교를 '하나만 더'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학교를 지어주면 그 앞에 길을 닦겠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은 원래 길을 뚫을 계획이 있는데, 학교를 지어달란 말을 하려고 이야기를 꾸며낸 거겠죠."
그렇게 세 번째 학교 '예스구미초등학교'가 완성됐다. 학교를 지어주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매년 방문할 때마다 장학금과 학용품 구매 미용으로 1,000~2,000만원 정도를 쓴다. 학교를 짓고 운영에게 깊이 관여하는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일으킬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부분이 교육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발전한 데는 뜨거운 교육열이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를 지어주고 교육을 후원하는 것은 가장 대한민국다운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염소 기부로 라오스에 '새마을 운동' 펼칩니다
지난 6월 라오스를 방문해 두 학교의 화장실을 새로 지었다. 지역 대학교와 초등학교에 염소를 15마리씩 기부했다. 염소를 갖다준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 최 회장은 "염소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염소를 주면서 말했어요.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새끼를 놓을 거다. 그 새끼를 이웃 학교에 분양해라. 그렇게 염소를 조금씩 주변으로 퍼지게 하라고요."
50-6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했다. 남의 집 송아지를 얻어와서 소가 될 때까지 잘 키운 뒤에 송아지를 낳으면 원래 소를 돌려주고 송아지를 얻었다. 당시에는 소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다. 송아지로 소 한 마리를 얻는 건 말 그대로 남는 장사였다. 최 회장은 "새마을 운동의 정신이 바로 그런데 있다"고 말했다.
"염소로 새끼를 얻고, 그 새끼를 다른 데 분양하려면 세 가지 마인드가 필요합니다. 염소를 잘 키우려면 근면해야 합니다. 또 자기 손으로 키우니 자조라고 할 수 있지요. 새끼 염소를 이웃에 분양하는 것은 다 함께 잘살자는 마인드, 혹은 협동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염소 분양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 운동입니다."
근면 자조 협동은 최 대표의 평생의 신념을 대변한다. 그는 13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고, 20살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일찍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부지런히,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20대와 30대를 보냈다. 철저하게 고독하고 외로운, 그래서 스스로 일어나 주변 사람들과 어깨를 겯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월을 견뎠다. 그의 지난 세월은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간첩 누명으로 숨어 살아야 했던 아버지
그의 부친은 육군 중령으로 미군들의 통역을 맡고 있었다. 미군들과 어울려 살롱 출입을 종종 했는데, 한번은 살롱에 수준급의 기타 연주에 가야금까지 잘 타는 여자가 들어왔다. 단숨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갑자기 미군 장교를 향해서 권총을 쐈다. 장교는 목숨을 구했지만 미군 헌병 하나가 죽었다. 이 일로 엉뚱하게 최 대표의 부친이 간첩으로 몰렸다.
아버지의 결백을 믿은 미군 고위 장교가 "사건을 잘 마무리할 테니 일단 피해 있으라"고 권했고 아버지는 가족도 모르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 길로 영영 이별이었다. 이후 아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세 살에 아버지가 가정을 떠난 뒤로 고되고 외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최 대표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지냈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아버지가 육군 중령으로 있을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가장이 떠난 이후로는 일상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다. 울산에 있던 시절 바다에 들어가 해삼이며 전복을 따서 시장에 내다판 적도 있었다. 중학교까지 울산에서 다닌 후 대구로 올라온 뒤에는 어머니가 간이 식당을 차렸다. 장사는 잘 안 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잣집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어머니였다. 능숙한 수완을 발휘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난 아버지였지만, 원망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끝끝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던 이유
아들의 나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부자 상봉의 기회가 있었다. 이모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다. 최 대표에게는 이모가 세 분 있었다. 그중 한 분이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백화점 앞에서 우산을 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비 좀 같이 피합시다" 하면서 우산 밑으로 들어왔다. 이모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외쳤다. "형부!"
그때 아버지는 처자식을 만나고 싶어 전에 살던 울산에 내려가 수소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모는 당신의 아들이 대구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두 사람은 사흘 후에 조우한 백화점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부부가 다시 만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모는 사흘 뒤 그 장소에 나갈 수 없었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나 백화점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리던 아버지는 결국 하릴없이 돌아서야 했다.
"이모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곧장 병원에 실려가 3달 동안 병원 신세를 졌어요." 그후 이모가 대구에 내려와서 그 사연을 털어놓았다.
"네 아버지와 너는 서로 만날 운명이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는 다행히 누명을 벗었으나 그 사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 소식을 들은 최 대표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가 방해가 될 거란 생각에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모를 통한 상봉이 실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최 대표는 끝내 아버지와 재회하지 못한 상심이 컸던 까닭이라고 여기고 있다.
한번은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다. 허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웬일입니까?" 하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눈물만 뚝뚝 흘리다가 돌아섰다. 그 얼마 후 아버지의 부고가 들려왔다.
1980년 5월 화물차를 끌고 광주로 갔다
부모님을 모두 잃은 후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신발도매상 배달 일이었다. 자전거로 배달을 했다. 한번 배달을 나가면 쌀 세 가마니 무게의 신발을 쌓아서 운반했다. 자동차가 뒤에서 경적을 눌러대기 일쑤였다. 화를 내던 운전자도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는 청년을 보고 나서는 으레 깜짝 놀라면서 "작은 거인"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일로 인정을 받았으나 마음 한켠이 늘 허전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따뜻한 밥 한 끼 나눌 가족이 없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다. 어렵게 가정을 꾸렸다. 가족이 생기니 힘이 절로 났다. 신발 도매상 종업원 생활 10년을 마친 뒤 신발가게를 열었다. 장사는 잘 안 됐다. 마음이 약해서 깎아달라는 사람의 사정을 물리치지 못했고, 가게에 불이 나기도 했다. 병무청 앞마당에서 신체 검사를 하러 오는 청년들을 상대로 냉차를 팔기도 했다. 야채전도 열었고, 건어물 장사도 했다. 뭘 해도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러다 밍크 담요 공장에 취직했다. 기술은 가지고 있었다. 신발 배달일을 하던 시절, 밤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밍크 담요 공장에 가서 일을 거들어주면서 기술을 배워둔 덕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밍크 담요 공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으나 제조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숙지한 사람이 없었다. 몇 해 안 가 구미에서 밍크 담요 기술 1인자가 되었다. 70년대의 일이었다. 최 대표의 공장에서 만든 담요는 품질이 좋아서 날개 돋인 듯이 팔려나갔다.
공장 사택에 지내며 10년을 일한 뒤 퇴사했다. 월급도 괜찮았으나 일이 너무 힘들었다. 24시간 대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서 은근히 스트레스가 컸다.
40대에 새출발을 했다. 화물차 운전을 시작했다.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얼마 안 가 화물차 운전 기사들 사이에서 리더로 인정을 받았다. 하루는 운전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화물차가 돈이 안 된다는 게 통념이다. 우리가 그걸 한번 바꾸어보자."
화물을 운반하면 수입은 괜찮았다. 그러나 허투루 빠져나가는 돈이 많았다. 그는 동료들과 의논해 세 가지 금지사항을 규약으로 정했다. 첫째는 노름. 노름으로 차를 날린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 음주 운전. 세 번째는 바른 행실이었다. 규율을 어기면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렇게 화물차 운전자들 사이에 기강을 잡았다.
그의 말이 통했던 데는 그의 탁월한 실적이 한몫했다. 그는 3년 동안 서울을 매번 20번 이상 다녀왔다. 27번을 다녀온 달도 있었다. 1980년 5월에는 광주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주에서 역전에 쌓인 돌무더기와 멀리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죽을 때까지 봉사하는 것이 목표
화물차 운전자 시절에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포장 작업을 하면서 나온 파지를 한쪽에 모아뒀다가 그걸 판 돈으로 보육원에 기부했다. 그때 만난 김건수 회장은 라오스 봉사활동까지 함께하고 있는 '봉사 친구'가 됐다. 40년이 넘은 지우다.
화물 운전을 하던 시절에 모 여고에서 스쿨버스를 몰기도 했다. 그때도 훈훈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교통비가 없는 아이들을 보고 한 달에 30인분의 교통비를 기부했다. 물론, 학생들 모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동료 기사들과 교사들까지 교통비 기부에 동참했다. 해당 여고에서는 교통비 기부가 아직도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14년에 운전대를 놓고 혜원자원을 차렸다. 그때 자식들에게 선언했다.
"아버지에게 기대지 마라. 유산은 십 원도 없다. 이 사업체에서 나온 돈으로 무조건 봉사할 것이다. 수익의 20~25%는 무조건 사회환원한다."
자녀들이 마뜩잖아 했다.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딸들에게 어르신 무료급식 봉사를 시켰다. 그랬더니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서 자랑스러워요' 하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봉사는 진심이다. 혹여 정치인이나 단체에서 기부금을 들고 오면 봉투는 돌려준다. 기부금 대신 앞치마를 입혀 '행동으로' 봉사하게 만든다. 사업체 매출이 떨어질 때는 봉사 활동 때문에 적자가 날 때도 있지만 흔들리지 않고 봉사를 이어왔다. 최 대표는 "밥 한끼 대접이지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보람과 감동은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다"면서 "자식들이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에 적극 동참한 이유다"고 밝혔다.
무료 급식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외형적으로도 많이 변했다. 봉사자도 늘었고 어르신들이 식사하는 테이블도 최신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자리를 깔고 상을 차렸지만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해 보여서 얼마 전에 의자와 식탁을 구매했다. 한 끼라도 편안하게 드시게 하고 싶은 마음에 넘치도록 사치를 부렸다.
현재 혜원자원에는 비정규직까지 9명의 직원이 일한다. 너무 성실히 봉사하느라 재정이 휘청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개의치 않는다.
"가난도 겪었고, 배신도 당했지만, 가장 힘든 건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서로 어울리고 보듬어야 행복합니다. 돈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서로 돕고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제가 봉사를 놓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최 대표는 "내가 꿈꾸는 새마을은 서로 돕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다"면서 "어르신 급식 봉사도, 라오스 학교 지어주기, 염소 기증 모두 내 나름의 새마을 운동이다"고 밝혔다.
"제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라오스 어린이들에게 연필 사주고 장학금 주고, 또 같이 늙어가는 분들과 따뜻한 밥 한끼 나누며 사는 것이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추종호 기자 c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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