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미술인’ 독보적 표상 김복진의 친일 행적···“불편부당하게 공과 모두 알려야”

김종목 기자 2023. 7. 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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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다산 선생상’을 제작했다”는 내용이 생애와 작품을 다룬 글이나 기사 중 더러 나온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을 떠올릴 법한데, 김복진이 흉상을 제작한 대상은 다산(多山) 박영철(朴榮喆, 1879~1939)이다. 박영철은 일제강점기 군부대신 관방부관, 중추원 참의 등으로 일한 친일파다. 3·1운동 두 달 뒤엔 매일신보에 “조선인에게는 나라를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32년 이봉창 의거 때는 조선총독부 등에 사죄의 뜻을 전하고 근신했다. 조선총독부의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일제는 1939년 박영철이 사망했을 때 ‘욱일중수장’을 줬다.

독보적 항일 미술인 김복진의 친일 행적
김복진의 ‘다산 선생상(다산 박영철상)’과 46세 강원도지사 시절 대례복을 입은 박영철의 모습. 황정수 제공

김복진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활동으로 6년여 옥고를 치렀다. ‘항일 미술’을 찾기 힘든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김복진은 독보적인 ‘항일 미술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출옥 후 친일파 동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스 검색 사이트인 빅카인즈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하면 ‘김복진의 친일’ 기록이 나온 기사 건수는 1건이다. 이태호(당시 전남대 교수)가 칼럼 ‘친일 미술인, 세 갈래로 절개 꺾었다’(경향신문 1991년 9월 3일자)에서 64명의 친일 미술인을 열거하면서 그중 1명으로 적었다. 이태호는 같은 해 ‘1940년대 초반 친일 미술의 군국주의적 경향성’이란 논문을 발표한다. 이태호의 연구가 2009년 발간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중 ‘친일 미술인’의 바탕이 됐다.

이태호 칼럼 ‘친일 미술인, 세 갈래로 절개 꺾었다’(경향신문 1991년 9월 3일자) 왼쪽 하단에 김복진을 포함한 미술인 명단이 나온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복진의 친일을 다룬 문헌도 드물다. 윤범모(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김복진 연구>(2010, 동국대출판부)엔 ‘다산 선생상’ 제작 사실이 짧게 나온다. 이 책 183쪽 중 관련 문단은 다음과 같다. “김복진이 만년에 친일파의 거두인 박영철 흉상을 제작했다는 점은 하나의 오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박영철이 고미술과 민족문화를 애호하며 선양사업을 도왔고 또 대학에 소장 미술품을 기증했다 해도 그의 친일 행각과 견주어 본다면 안타깝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더불어 만주 지역의 대표적 친일 인사인 김동한의 동상을 제작했다는 점과 함께 김복진 말년의 오점으로 기록된다.” 김동한(金東漢, 1892~1937)은 독립운동을 하다 전향한 뒤 만주에서 항일운동가 토벌에 앞장선 친일파다. ‘만선일보’ 1939년 12월 10일 자 ‘고 김동한씨 동상 제막식 성대 거행, 만선 대표 수천 명 참렬(參列)’ 기사엔 “만주국 치안 숙청의 공로자이요, 동아 신질서 건설의 공로자인 고 관동군 촉탁 겸 협화회 중앙본부 촉탁 김동한씨의 영구불멸의 위대한 공적을 영원히…”라는 내용이 나온다.

<김복진 연구>(윤범모, 2010, 동국대출판부) 중 김복진의 박영철 흉상 제작을 ’말년의 오점‘으로 기록한 부분.
조선미전 매해 참여 총독상도 받아, 조선총독부 ‘불멸의 애국옹’ 동상도 제작

‘말년의 오점’으로 기록된 김복진의 친일파 동상 제작은 이 둘 뿐일까. 미술평론가 황정수는 올 초부터 자신의 페이스북 등을 통해 지속해서 김복진의 친일 문제를 제기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 여러 문헌을 분석했다. 황정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에 추가 인터뷰를 더해 정리했다.

1934년 출옥한 김복진은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작품을 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문화 정치 일환으로 창설”한 미술 작품 공모전이다.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매해 조선미전에 참여했다. 사망하던 해인 1940년 ‘다산 선생상(다산 박영철상)’과 ‘소년’을 출품했는데, ‘소년’은 총독상을 받았다. 수상 뒤 조선미전의 ‘추천 작가’로도 뽑힌다. 친일파 동상도 만든다. 그 대상은 ‘인삼왕’ 손봉상, ‘인천 친일 관료’ 김윤복, ‘신문왕’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이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불멸의 애국옹’으로 불린 이원하(李元夏, 1866~1939) 동상도 1939년 제작한다. 이원하는 죽기 직전 일장기 게양대에서 궁성요배를 하고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1939년 조선문화영화협회가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라는 영화로 만들 정도로 일제의 대표적인 선전 대상 친일 인물이었다.

김복진이 동상을 만든 이원하는 일장기 게양대에서 궁성요배를 하고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의 선전 선동 대표 인물 중 하나였던 이원화 이야기는 <국기 아래에서 나는 죽으리>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황정수 제공

수감 전 김복진은 홍명희,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 동상을 만들었다. 황정수는 “김복진은 출옥 뒤에 친일 인사와 같은 국민 정서에 반하는 인물들의 동상조차도 거절 없이 도맡아 제작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나서서 입찰에 응해 낙찰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는 “(조선미전 참여와 친일파 동상 제작 등) 그의 행동은 시기를 고려할 때, 한국 미술가 중 가장 심한 친일 활동이었다. 이런 김복진의 활동은 ‘창씨개명’(일본식 성명 강요) 정책이 수립되기 전이고,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더 충격적”이라고 했다. 황정수는 “6년여의 감옥생활이 끝난 뒤 그의 삶은 극단적인 변화를 보인다. 마치 지난날의 김복진과는 다른 사람처럼 사상을 전향하고 일제와 가까이 지냈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가장 친일적인 인사를 가장 항일적인 인물로 오해했다”고 말했다.

김복진 출옥 후 ‘사상운동 방면에서 청산’ 기사 발굴

황정수는 김복진이 일본의 새로운 문물에 경도돼 일본에 들어가 공부할 결심을 했다는 점도 거론한다. “일본에 들어가 살 생각으로 도쿄에 혼자 가서 가족을 데려올 준비를 한다. 그러던 중 세 살배기 어린 딸이 장티푸스로 죽자 돌아와 폐인과 같은 삶을 살다 얼마 후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1940년 부민관에서 열린 유작전과 추도회엔 김은호, 이광수, 방응모 등 당대 친일 유명 인사들이 모였다고 했다. 황정수는 “출옥 후에는 반대편으로 전향하는 듯한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근거로 삼은 자료는 1938년 매일신보 6월 3일자 ‘재출발 후 처음 : 감개(感慨) 있는 김복진씨’라는 제목의 기사다. 이중 “조각 조선의 권위 김복진씨는 조선미전에 특선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나 중도 7, 8년 동안 조각계에서 떠난 후에 소화 10년 경 ‘사상운동 방면에서 청산’하고 다시 조각계로 전향한 이래 두 번 출품하여 입선되었으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김복진이 ‘불멸의 애국옹’ 흉상을 기증하겠다는 매일신보 기사(1939년 4월 12일자, 왼쪽)아 ‘사상 운동 방면에서 청산’을 기록한 매일신보 기사(1938년 6월8일자). 황정수 제공

황정수는 “이제라도 김복진 삶을 다시 연구하고, 미술사에서 그의 공과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현도 결전미술전과 해양국방 미술전람회 참여 확인

황정수가 공과를 다시 가려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건 김복진뿐만이 아니다. 최근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 1920~1976)도 대상이다. 박래현의 친일 사실도 언론 보도나 문헌에서 찾기 힘들다. 재조선 일본인 화가인 에구치 게이시로(江口敬四郞)의 제자인 박래현은 1941년 도쿄에 머물면서 조선미전에 ‘부인상’을 출품했다. 앞서 1940년엔 기도 가즈히데(木戶一秀)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1943년에는 ‘단장’을 출품해 총독상을 받았다. 1944년 마지막 조선미전에 ‘산로’를 출품한다. 같은 해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열린 결전미술전에 ‘공작장’을 출품해 특선했다. 결전미술전은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개최된 미술 전람회”다. ‘결전미술전’ 참여도 ‘친일 미술’의 주요 잣대 중 하나다.

박래현이 기도 가즈히데라는 일본 이름으로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단장하다’ 는 총독상을 받았다. 황정수는 박래현은 친일 미술인 주요 잣대인 ‘결전미술전’에도 참여했다고 했다.

박래현은 1945년 ‘해양국방 미술전람회’에도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요조훈련’을 내 가장 큰 상인 ‘경성지방 해군인사부장상’을 받았다. 황정수는 이를 두고 “박래현이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다는 혐의를 씻기 어려운 증거로 남는다. <친일인명사전>의 친일 기준에 따른 친일 미술인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당시 여성 미술인들이 거의 미술계 활동을 멈추었는데, 유일하게 박래현만이 전쟁 고무 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그런데 어떻게 친일 미술인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 그림 가장 많이 그린 정현웅은 ‘친일인명사전’에선 빠져

황정수는 친일 행적이 뚜렷한데도 친일 미술인에서 빠지거나, 권력도 없고 뚜렷한 행적이 없는데도 친일 미술인으로 규정된 문제도 지적한다. 김복진과 박래현도 애초 이태호의 친일 미술인 명단에는 포함된 인물이나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빠진다. 정현웅도 마찬가지다. 정현웅(鄭玄雄, 1911~1976)은 황정수가 가장 친일적인 작품을 많이 그린 작가로 꼽는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잡지 표지화를 많이 그렸다. ‘신시대’, ‘소국민’, ‘방송지우’ 등 각종 잡지에 근로보국, 식량 증산 등 식민 통치 정책을 선전하는 표지화를 그렸다. 특히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는 혼자 3년간 계속해서 그렸다. 1945년 4월에도 ‘하늘은 우리가 정복할 곳이다’라는 제목의 표지화를 ‘소국민’에 실었다.

정현웅은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은 친일 그림을 그린 작가인데 ‘친일 미술인’ 명단에는 빠졌다. 사진은 ‘고하제독’(왼쪽)과 ‘조광’ 1937년 10월 호 표지. 황정수 제공

황정수는 종군미술전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간 지성렬(1909~?)을 두고 “이름만 생소한 것이 아니라, 행적도 정리되어 있지 않고 작품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작가의 이름과 전시회 기록만 달랑 전하는 유령 같은 작가”라며 “친일 미술인에 선정된 것이 의문스럽다”고 했다. 지성렬과 비슷하거나 더 심한 친일 활동을 한 “송정훈과 정현웅이 유족의 탄원으로 명단에서 보류되고, 지성렬이 포함된 것은 불공정한 처사”라고 했다.

박득순도 친일 미술인 주요 판단 근거인 ‘단광회’에 참여

황정수는 ‘친일 미술인 23인’의 선정 기준과 잣대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새로운 사료 발굴에 따라 추가할 인물이 늘어났다고도 했다. 박득순(朴得淳, 1910~1990)도 한 예다. 박득순은 그간 애국기 헌납을 독려하는 내용의 전쟁화를 그렸다는 것 말고는 친일 행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황정수는 그가 단광회(丹光會) 참여 화가라는 걸 찾아냈다. 1943년 2월 “성전(聖戰) 하에서 미술보국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창립한 단광회는 일제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미술단체다. 회원 19명 중 한국인으로는 임응구, 김인승,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박영선, 이봉상 등 7명이 포함됐다. 단광회 참여 경력이 친일의 주요 잣대였다. 7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갔다.

매일신보 1945년 3월 26일자 기사 ‘단광회 유화 소품전 - 24일부터 미스코시서’에 기록된 新井純平(신정순평, 아라이 준페이, 붉은 선). 황정수는 “신정순평이 박득순”이라고 했다. 오른쪽 그림은 단광회 회원 19인이 합작해 그린 ‘조선징병제 실시 기념화’. 황정수 제공

황정수는 매일신보 1945년 3월 26일자 기사 ‘단광회 유화 소품전 - 24일부터 미스코시서’ 중 출품자 김인승, 박영선, 최연해, 신정순평 중 신정순평(新井純平, 아라이 준페이)이 박득순이라고 했다. 황정수는 “최연해는 이미 평양에서 열린 결전미술전에서 가장 큰 상을 받은 경력이 있으니, 단광회의 경력이 추가되면 그 또한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득순도 반도총후미술전에 입상한 데다, 친일 작품도 여러 점 전한다. 친일 미술 작품의 실물이 전하는 유일한 작가이기도 하다. 단광회의 경력까지 더하면 일급 친일 경력자가 된다”고 했다. 박득순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말기 ‘특공대’라는 삽화도 그린다. 일본 전투기가 미국 함정을 폭격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박득순의 1945년 작 ‘특공대’. 오른쪽 하단에 박득순의 일본 이름인 新井純平(신정순평, 아라이 준페이)이 보인다. 황정수 제공
‘아라이 쥬꼰’ 이름으로 결전미술전 참여한 박수근

사료 발굴로 친일 행적이 드러난 화가 중엔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도 포함됐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배원정은 2022년 발표한 논문 ‘신예화가 박수근의 등단 – 춘천과 평양에서의 초기 미술 활동을 중심으로’에서 박수근이 신정수근(新井壽根, 아라이 쥬꼰)이란 이름으로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과 1944년 ‘평양 결전미술전’에 참여했다고 했다. 평남도청 사회과에 근무하면서 전쟁 포스터와 일제의 선전·선동 종이 연극인 ‘가미시바이(紙艺居)’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고 했다. 그림은 ‘시국인식’ ‘군사사상 보급’ ‘세금납부’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이다.

배원정의 2022년 논문 ‘신예화가 박수근의 등단 - 춘천과 평양에서의 초기 미술 활동을 중심으로’ 중 박수근의 결전총력미술전 참여 등을 기록한 부분. 출처: 같은 논문.

황정수는 명단에 든 친일 미술인 23인만 단죄하고, 그 명단에서 빠진 이들에게는 관대한 미술계 현실을 비판한다. 황정수는 “동문수학하며 함께 친일했으나 23인에 들지 않은 화가의 작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며 “이들 작가를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과 현초(玄艸) 이유태(李維台, 1916~1999)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화가다. 황정수는 “둘 다 친일적 요소가 있지만, 일본에 유학한 이유태가 친일 성향이 더 강했다”고 했다. “장우성이 그린 초상화는 표준 영정에서 제외하라고 난리지만, 친일 인물 23인에서 빠진 이유태가 그린 초상화 등 그의 작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불편부당한 단일 기준과 잣대 문제다. 배원정도 같은 논문에서 박수근의 결전미술전 참여 등을 두고 “지금까지 전쟁미술에 참여했단 사실 때문에 친일화가로 낙인찍힌 이들을 두고 박수근만 제외시켜 준다면 그것도 또한 선택적 친일이자, 공평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요지경인 미술계 친일 미술인 문제

미술계 친일 미술인 문제는 요지경이다. 미술계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하거나 친일 미술을 연구한 이들도 김복진, 박수근, 박래현 등 새로 확인된 친일 문제에는 침묵한다. 황정수는 “친일 미술인의 초상화를 떼어야 한다고 큰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새로운 친일 자료가 발견되면 단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옳다. 그러나 현실은 반성이 없다. 오히려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새로 김복진미술상을 제정하는 등 친일 미술인의 잘못을 덮는데 힘을 기울인다”고 했다. 그는 “마치 연구가 끝난 것처럼 새로 발견된 자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미 규정지어버린 친일 미술인에 대해 수정하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것일까”라고 되물었다.


☞ 한국 전통화는 수묵화라고? 찬란한 채색화도 있었다
     https://www.khan.co.kr/culture/art-architecture/article/202204181422001

‘반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문재인 정부의 국공립 미술관들과 미술인들도 친일 화가들 작품이 여럿이 포함된 ‘이건희 컬렉션’은 찬양하듯 아무런 비판 없이 전시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 ‘절필시대’ 전을 열며 1944년 결전 미술전람회에서 ‘상재전장’으로 특선을 차지한 정종여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친일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립박물관·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의 2022년 ‘한국 채색화의 흐름전’은 김은호 등 친일파 그림도 전시했다. 이때는 화가의 친일 행적이나 일본 관련 경력을 적시해 관람객이 알 수 있도록 작품 설명에 적어뒀다.

‘친일 월북 작가’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집필위원으로 참여한 미술평론가 정준모는 “친일 작가에 대한 국가차원에서의 원칙이 필요하다. 월북작가나 사회주의 계열 작가들의 친일행적이 축소되거나 또는 잠깐의 실수처럼 미술사에서 다뤄지는 것도 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친일 미술인 규정 문제는 옥션 등 미술시장 작품 가격이나, 갤러리 작품 판매, 미술관의 소장과도 이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즉 여러 미술 주체들의 ‘이해 관계’가 엮인 문제다.


☞ [기자칼럼]갤러리 가는 길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806042057025

황정수는 “친일 미술인 명단을 처음 정할 때 관련 자료는 한정적이었다. 지금 새로 발견되는 자료들이 많아 친일 미술 개념이나 미술인에 대해 전반적인 기준을 새로 잡아야 한다. 과거의 규정에 따라 일부 작가를 린치하는 것보다는 전반적 친일 양상을 논리 정연하고 공평하게 새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황정수는 일제 초반기 성인일 때 부역한 인물과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이들을 구분해서 보는 것을 예로 들었다. 황정수는 “일제 초반기 부역한 이들의 친일이야말로 조국을 빼앗기는 과정에서 사회의 주도적 인물이 해서는 안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황정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이들을 포함해 미술계 모든 화가의 친일 기록 즉 공과를 정리해 널리 알리자고 제안한다. “모든 작가의 친일 정도를 모든 이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새로 발굴되는 자료는 정기적으로 계속 업데이트하면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를 겪은 근대기 화가들의 작품을 정치적 입장과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분리해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후에 친일 작가에 대한 판단은 각자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수는 근대 작가들의 친일과 항일에 관한 내용을 당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해 올해 안에 책을 내려 한다. 황정수는 “혼란스러운 근대기를 살았던 한국 미술인들이 자신이 행한 행위에 걸맞은 평가를 받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책이다. 불편부당한 판단으로 불이익을 받는 작가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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