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기시다, 북·일 정상회담 군불 때기
(시사저널=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겉으로는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미·일 대북 공조에 가세하면서 압박하는 형국이지만, 내부적으로 결이 다른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은밀한 모색이다.
일본 정부가 공식 부인하기는 했지만 북·일 간 국장급 비밀 실무접촉이 최근 이뤄졌다는 관측이 나왔고, 김정은-기시다 간 정상회담 관망까지 서울과 도쿄 외교가에서 제기된다. 그만큼 북·일 양측이 당국 간 회담 등을 통해 풀어야 할 현안이 있다는 얘기다.
대미 관계와 경제난에 숨통 트는 효과
일본은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희망을 숨기지 않는다. 기시다 총리는 5월27일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인 납북자 귀국 촉구 국민대집회'에 참석해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고위급 협의를 갖고 싶다고 밝혔다. 또 6월21일 기자회견에서는 "북·일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총리 직할의 고위급 협의를 하는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좀 더 구체화된 그의 발언은 직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문제를 챙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목되는 건 북한의 반응이다. 외무성을 통해 잇달아 나오고 있는 메시지는 예상 밖으로 누그러진 톤이다. 한국과 미국에 대해 각을 세우고 특히 윤석열 정부를 향해 '괴뢰' 운운하면서 상종조차 않겠다는 적대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 차이가 난다. 이는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우면서 미·일을 제국주의 외세로 치부하던 패턴에서도 벗어난 모양새다.
기시다 총리의 제안이 나온 지 이틀 뒤인 5월29일 박상길 외무성 부상이 내놓은 담화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두 나라가 서로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전향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북한의 반응에서는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하거나 깎아내리는 표현을 절제하고 있는 모습이 감지된다.
일본 정치인과 정당 입장에서는 납치 일본인 문제의 해결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데 긴요하다. 올 하반기 중 실시되는 중의원(하원) 해산과 총선거를 앞둔 처지인 기시다가 이 문제의 해결 필요성을 자주 언급하고 북·일 정상회담까지 발을 내딛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김정은도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일본이 필요한 형국이다. 지난해 9월 핵무기 법령화를 공표하고 잇단 장거리탄도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 수위를 한껏 끌어올렸지만 성과는 변변치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은 남북관계의 지형도를 바꿔놓았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하는 한미 대북 압박은 북한의 숨통을 죄고 있는 모습이다. '아사자 속출'이란 관측까지 나올 정도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이대로 가다간 민심이반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김정은으로서는 회심의 반전카드가 필요한 국면이란 얘기다.
기시다 총리까지 가세한 한·미·일 공조에서 일본은 약한 고리다. 대북 제재와 압박에 힘겨운 상황을 맞은 김 위원장 입장에서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면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다. 기시다를 통해 바이든에게 보낼 대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데다 청구권 자금 등을 챙겨 경제난에 숨통을 트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과 북·일 관계 개선이란 숙제를 안고 있는 일본 정치권과 총리 입장에서도 북한의 러브콜을 외면하기 어렵다. 그동안의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비밀접촉이나 협상이 남북 관계나 한반도 정세, 한·미·일 대북 공조 등의 분위기와 무관하게 불쑥불쑥 성사돼 왔다는 건 이를 잘 보여준다. 한미 입장에서는 마치 일본이 딴생각을 품고 북한과 내통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김정은, 항저우AG 계기로 닫았던 문 열까
물론 북·일 양측의 메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납치 일본인 문제는 서로 양보하기 쉽지 않은 최대의 걸림돌이다.
북한과 일본은 이미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돌파구 마련을 시도했다.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만나 국교 정상화 문제 등을 논의했지만 납치자 문제 해결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일본 측은 17명의 납북자 가운데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가 일시 귀환 형태로 데리고 온 5명을 제외한 12명이 여전히 북한에 남아있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나머지 납북 일본인은 8명뿐인데 지금은 모두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나머지 4명의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6월28일에도 관영 매체를 통해 "납치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의 아량과 성의 있는 노력에 의해 이미 되돌릴 수 없이 최종적으로 완전무결하게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이 실현 불가능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구태의연하게 국제무대에 들고 다니는 것은 부질없는 시간 낭비며 '전제조건 없는 일·조(日朝) 수뇌회담'을 희망한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하고 있는 일본 당국자의 입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납북자 문제를 빼고 정상회담을 통해 관계 개선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사실 북한과 일본은 2차례 정상회담 논의 외에도 스톡홀름 합의로 불리는 관계 개선 로드맵을 갖고 있다. 2014년 5월28일부터 사흘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국장급 협의를 통해 북·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북·일 양측이 해야 할 일을 문서화하는 진전을 이룬 것이다.
이 합의에서 북한은 △납치 및 행방불명 일본인에 대한 전면조사 △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조사 가능한 권한을 가진 특별조사위원회 설치 △생존자 발견 시 일본으로의 귀국 조치 등을 취하도록 하고 있다. 또 일본은 △북·일 간 신뢰 조성과 관계 개선 지향 △특별조사위 활동 시점에 대북 제재 해제 △적절한 시기 대북 인도 지원 등을 이행하도록 하고 있다.
향후 북·일 관계 진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자제하는 입장을 취하고, 코로나·대북 제재로 닫았던 문을 열어 국제무대로 복귀하는 상황과 연계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일찌감치 선수단 파견 입장을 밝힌 것과 관련해 김정은의 방중 및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도 이 같은 기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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