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멘터리] 시네마천국으로 간 음악가의 고민
“SBS스페셜”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일이다. 평소 눈 여겨 보았던 따뜻하면서도 이지적인 목소리의 베테랑 성우를 캐스팅해서 녹음실에 갔는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성우 분 왈, 자신이 내레이션을 녹음할 때 각 시퀀스의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 달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당시엔 녹음실에 갈 때 현장 사운드와 인터뷰 오디오만 들어가 있는 편집본을 들고 갔다. 아직 음악과 (음향)효과 작업을 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연출자로서 나는 메인 테마와 엔딩 곡 정도는 물색해두고 있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분량에 들어 갈 음악은 전혀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 영화 인생의 7할은 재개봉관에서 시작되었다. 연신내 뒷골목의 양지 극장, 지금은 신라 스테이가 들어 선 서대문 로터리 화양 극장, 안암동 로터리의 안암 극장 등지에서 본 재개봉 영화와 동시 상영 영화들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대문 시장 안에 있던 작은 재개봉관인 남대문 극장에도 종종 드나들었다. 거기서 본 영화 중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 영화가 있으니 “원스 어픈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다. (재개봉관이라 정확히 몇 년도에 이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청불 영화이긴 한데 당시의 재개봉관은 청소년들이 공공연히 청불 영화를 보는 곳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로 기억하는데,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작인 이 영화를 보면서 사실 상당히 졸았다. 이 영화는 판본이 많아서 몇 시간짜리를 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당시 보던 영화들에 비하면 무지하게 길었고 어두침침하고 퀴퀴한 재개봉관 분위기도 깜빡 잠이 들기에는 딱 좋았다. (거의 네 시간짜리 영화를 뭉텅뭉텅 잘라서 틀다보니 이야기가 잘 이어지지 않아 졸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껌뻑껌뻑 졸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활짝 열리는 순간들이 있었으니, 바로 메인 테마와 메인 테마곡보다 더 유명한 ‘데보라의 테마’, 팬플룻으로 유명한 ‘차일드후드 메모리스’ 같은 OST가 흘러나올 때였다. 뭣도 모르는 청소년이 보기에도 이 음악들은 단순한 영화 음악이 아니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말대로 “눈으로 보이는 음악”, 왕가위의 얘기처럼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멜로디였다.
“원스 어픈 어 타임…”의 감독인 세르지오 레오네는 크랭크 인 전부터 작곡가에게 음악을 의뢰해서 미리 받았고, 촬영장에 이 음악을 틀어놓고 영화를 찍었다. “대부2”, “택시 드라이버”, “디어 헌터”, “성난 황소” 등으로 당시 이미 명배우였던 로버트 드니로는 촬영장에 ‘데보라의 데마’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연기를 했다. 웬만큼 곡이 좋지 않아서는 이런 식으로 촬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음악을 쓴 사람이 바로 엔니오 모리꼬네(1928-2020)이다.
“시네마천국”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봤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락없이 천재였다.
“따이야이야~ 와와왕~” 코요테 울음소리에서 착안해 서부극 사상, 아니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휘파람 선율을 뽑아낸 것만 봐도 명약관화하지만(“석양의 무법자”, 1966), 영화 화면을 띄워놓고 오케스트라 녹음을 하면서 그때 그때 연주자를 즉흥적으로 지목하는 라이브 녹음을 한다든지(“수정 깃털의 새”, 1970), 녹음실에서 지휘를 하는 동시에 조정실의 테렌스 맬릭 감독과 원격으로 체스를 둬서 이긴 일화(“천국의 나날들”, 1978)를 봐도 그렇다.
엔니오는 악보를 쓸 때도 피아노를 치면서 쓰는 게 아니라 피아노 앞에 서서 건반을 보면서 바로 악보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머리 속에 모든 음이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면 구순인 엔니오가 자신이 수십 년 전에 작곡했던 음악의 선율과 연주 등을 매우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놀랄 수 밖에 없다. (엔니오가 직접 멜로디를 불러 보이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하지만 엔니오 같은 음악 천재가 음악을 쓰지 않겠다고 한 영화도 있다. 198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미션”(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음악을 맡았을 때 일이다.
-롤랑 조페: 영상 시사 때 엔니오 쪽을 보니 등받이 위 머리가 보일락 말락하게 몸을 낮춰 앉았더라고요. 옆 얼굴을 봤는데 울고 있었죠.
-엔니오: 학살당하는 원주민들과 선교사들이 애통했어요. 음악 없이도 아름다운 영화라 망칠 것 같았고요.
-롤랑 조페: 음악이 필요없는 영화라고 하길래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그래도 엔니오가 못하겠다며 그냥 나갔어요. 그러던 중 나중에 전화를 받았어요.
-롤랑 조페: "롤랑이예요?" (네 그런데요.) "나 엔니오예요. 생각해봤는데…이런 악상이 떠올라서요." (롤랑 조페가 엔니오가 불러 줬던 멜로디를 흉내낸다) '따라다라단~ 다디따다 다다다 디다담~' 머리칼이 쭈뼛 서더군요. 음악을 들으니 영화가 펼쳐졌죠.
지금은 ‘넬라 판타지아’란 곡으로도 잘 알려진 ‘가브리엘의 오보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엔니오는 누에가 고치실 뽑듯 음악을 뽑아내는 타고난 영화 음악가였다. 마치 영상과 캐릭터를 음악으로 바꾸는 컨버터가 머리 속에 내장된 것 같았다.
“미션 작업 때는 나도 내가 신기했어요. 통제가 안됐죠. 무아지경에서 곡을 썼어요.” (엔니오 모리꼬네)
그런데 신들린 듯 악상이 떠오르는 엔니오 같은 천재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텅 빈 오선지 앞에서 느끼는 ‘백지(白紙)의 고독’이었다.
“생각이 바로 곡이 되지는 않아요. 그게 문제죠. 작곡을 시작하면 늘 그 점 때문에 괴로워요…생각은 이미 있지만 더 다듬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하고 찾아내야 해요.”
엔니오는 그렇게 백지의 고독과 싸우며 400여 편의 영화 음악을 만들었다. 한창 때는 1년에 20편을 만들기도 했다.
작가들도 백지의 공포, 백지의 막막함을 자주 토로한다. 이 공포는 많은 작품을 써냈다고 해서 극복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유명 작가들도 작품을 쓸 때마다 매번 힘들고 외롭다고 한다. 나 역시 칠십 편 넘게 이 칼럼을 연재하는 동안 백지의 두려움과 마주하지 않은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간혹 글이 술술 잘 풀린다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그때도 안도와 불안의 감정이 동시에 든다. 충분히 숙고하지 않아 더 좋은 문장이나 아이디어를 놓친 걸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불안감이다. 봉준호 감독도 작품을 할 때 불안하지 않으면 그게 불안하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 인생의 사운드트랙이죠.”
“듄(DUNE, 2021)”으로 영화 음악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고 있는 한스 짐머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15년 만에 돌아 온 인디아나 존스의 (사실상) 마지막 편을 봤는데, 어린 시절처럼 미치도록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따라란딴~ 따라란~”하는 멜로디로 시작하는 존 윌리암스의 ‘레이더스 마치’를 듣는 순간만큼은 가슴이 뛰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오디오는 비디오보다 강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 오디오는 파동이다. 마음을 울린다.
영화 “엔니오”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는 엔니오를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비유했다. 그렇다, 다들 알다시피 타란티노는 허풍쟁이다. 그렇다면 팻 메스니는 어떤가? 팻 메스니는 엔니오를 비틀스와 바흐, 찰리 파커에 빗댔다. 이 얘기를 전해 전해 들은 엔니오는 “200년 뒤쯤 두고 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쯤이면 엔니오 모리꼬네와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볼커 베텔만, 데미안 허위츠 등의 음악 중 어떤 것들이 살아남아 있을까.
타계 이태 전 엔니오가 말했다.
“최근에 와서 나는 음악을 작곡할 때, 음악을 생각할 때, 날 이해시키고자 할 때, 어려움을 떨쳐내려 할 때 내 안에서 일어났던 고통을 받아들였습니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문제는 보통 앞에 놓인 백지, 즉 형태와 의미와 가슴을 줘야 하는 흰 종이입니다. 그것은 작은 드라마입니다. 백지를 어떻게 채울까요? 거기에는 앞으로 생겨나서 발전될, 가능하고 때로는 불가능한 모든 것을 찾아나가야 할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 생각, 그리고 한번 해보겠다는 갈망은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절대 사라져서는 안 돼요.” (“엔니오 모리꼬네의 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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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기자 joole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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