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 [노원명 에세이]
9년 전 미국 동부에서 연수를 할때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필라델피아에 갈 일이 자주 있었다. 켄싱턴 거리에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래된 도시답게 쾌적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때 필라델피아는 평화로웠고 기품이 넘쳤다. 그 필라델피아가 마약 좀비들의 ‘성도’가 될 줄이야.
최근 미국을 다녀온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라는 인상평이다.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 등 서부의 대표적 관광 도시들도 펜타닐 중독자들과 노숙자들에게 점령당해 거리를 걸을 때는 몹시 긴장해야 한단다. 이슬비 내리는 시애틀 거리를 불안한 시선들을 피해 가며 걸어야 한다면 거기에 무슨 로맨틱함이 있을 것인가. 로맨틱하지 않다면 그것이 무슨 시애틀인가.
지난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 연휴 동안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최소 18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독립기념일엔 어느 지역에서나 불꽃놀이와 파티가 벌어진다. 그 와중에 ‘총질 놀이’를 한 미치광이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은 최근 워낙 빈발해서 웬만큼 많이 죽거나, 엽기적이거나, 한국인이 관계돼 있지 않으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도 않는다. 시리즈로 만들어진 B급 호러 영화 ‘더 퍼지(The Purge)’가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년 중 하루는 살인을 포함해 모든 범죄가 합법이 되는 가상의 미국이다. 마약을 통제할 수 없어 중독자들에게 주사기를 나눠주는 미국이라면 ‘총기 살인 면허의 날’을 지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쾌한 상상을 해 본다.
미국은 큰 나라이고 개인의 자유가 우선되는 나라다. 건국 이래 마약과 총기 문제는 늘 있었다. 이런 단편적 비극을 과장해 ‘미국이 망조가 들었다’라고 주장한 이야기꾼들도 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늘 틀렸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호령하는 대장 국가다. 나는 그 틀린 이야기꾼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한미동맹’의 가치를 확신하는 사람 중 한명이다. 그런데도 요사이 미국을 보면서 ‘이건 내가 아는 미국이 아닌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독립기념일에 나온 또 하나의 통계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갤럽(미국)이 설문조사를 했더니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극도로 자랑스럽다’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39%로 나왔다고 한다. 2001년부터 실시한 이 조사에서 최고점은 2003년의 70%였다. 그때는 9.11 테러이후 미국이 똘똘 뭉쳤던 특수 시기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같은 나라 국민의 자부심이 20년 새 30%P 감소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미국이 자랑스러울까 상상해 본다. 저 나라에는 한국 강남좌파들의 역할모델이라 할 수 있는 PC좌파들이 있다. 그들은 신문과 방송을 움직이고 젊은 세대의 애국심에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다(갤럽 조사에서 18~34세 민주당 지지자의 ‘미국이 극도로 자랑스럽다’는 응답은 12%로 가장 낮았다). 그 위선은 가증스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이들이 너무 싫은 나머지 등장한 것이 ‘트럼프빠’ 들이다. 내 눈에는 펜타닐에 취한 사람이나 트럼프에 열광하는 사람이 비슷하게 보인다. 이성도 논리도 없다. 그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할 것이고 승리할 가능성이 상당하게 점쳐진다. 미국 정치에서 상식이 고장 난 지 꽤 됐다. 악다구니가 논쟁을 집어삼켰다. 나는 이걸 ‘미국 정치의 한국화’란 관점에서 바라보곤 한다. 이쪽에선 한국이 미국의 선생이다.
내가 읽고 듣고 경험한 미국은 이런 미국이 아니었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십에 의해 기율 되는 개인 윤리,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 선의 편에 서고자 하는 용기와 투지, 약자에 대한 관용,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선 이상의 추구,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존중, 열정적 애국심...
미국은 지금껏 존재한 패권 국가 중에서 정복 활동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과 생활방식으로 세계를 매료시킨 유일한 국가다. 그들은 빼앗거나 착취하는 대신 거래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신념이 있었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했다. 보수주의적 정치 평론가 디네시 더수자는 저서 ‘미국이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서 “미국이 몰락한다면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해 미국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전 세계가, 아마 진보주의자들까지도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가장 신사적이었던 초강대국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50년 안에 미국이 몰락할 가능성보다 중국 공산당이 무너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지만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역사가 늘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가 무너지자 인류는 그보다 암울한 중세 1천년을 견뎌야 했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하는 시대가 올 가능성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대의 세계는 평균적으로 지금보다 불행해질 것이란 사실이다. ‘결국은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것이니 중국에 베팅해야 한다’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스스로 진보입네 하는 사람 중에 특히 많다. 기회주의는 그들의 특징이다. 진보라면서 이상도 없고 정의도 모른다. 진정한 진보라면 중국 독재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막기 위해 연대하고 싸우자 해야 할 것 아닌가. 세상이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미국의 시대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므로. 나는 미국이 중국을 비롯한 외부 도전 때문에 끝장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링컨 대통령은 스프링필드 청년회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온갖 재물을 끌어모아 군자금을 대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모든 군대를 동원해 나폴레옹을 지휘관으로 앉혀 수천 년 동안 쳐들어오더라도 이들은 오하이오 강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블루리지산맥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 내부에서 생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위험은 밖에서 오지 않습니다. 멸망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운명을 써 내리고 끝맺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자유인이 모여 만든 나라에 사는 국민으로서 영원히 살든가 아니면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약과 총기 사고, 인종 갈등, 히스패닉의 주류화와 앵글로색슨의 소수화, 극단적 정치 갈등, 낮아지는 자존감과 애국심….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의 ‘자살’을 예고하는 징조가 아니길 바란다. 예전의 미국이 그랬듯 시대의 모순을 뛰어넘는 건강하고 새로운 리더십이 창출되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내가 미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을 비롯한 나머지 세계는 미국 없는 세계에 적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미국을 대체할 후보가 중국뿐인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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