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63)복날엔 삼계탕?…제주엔 '닭 잡는 날' 따로 있다
제주선 음력 6월 20일 닭 먹고 기운 냈다 "농사주기와 연관"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여름철 복날만 되면 전국의 삼계탕 가게를 비롯한 보양식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몸을 보하는 차원에서 기운을 북돋워 주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이를 '복달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복날이 아닌 흔히 '닭 잡아먹는 날'이 따로 있다고 하는 데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초·중·말복 삼복이 더운 이유?
"초복 중복 말복 질기게 견뎌야 할 복더위에는 질기게 견뎌야 할 이 세상 된장 발라버릴 것들 대신 개장국이든 삼계탕이든 뱀탕이든 뙤약볕보다 더 드센 장작불로 푹푹 삶는 게 젤이다. 누가 더 질긴가 보자고 질긴 게 이기는 법이라고 뙤약볕도 이 세상을 푹푹 삶는다" (정양의 시 '복날' 중)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시'로 표현한 시인 정양은 '복날'이란 시에서 안 그래도 열 받을 일 많은 세상살이 속에 맞닥뜨린 삼복더위를 일컬으며 이열치열로 맞서는 게 제일이라면서 결국엔 '질긴 게 이기는 법'이라고 말한다.
장마와 함께 무더위가 극성이다.
1년 중 무더위가 가장 심하다는 삼복(三伏) 가운데 첫 번째 복날인 올해 초복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삼복은 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뜻한다.
올해는 7월 11일 초복과 21일 중복을 거쳐 내달 10일 말복이 이어진다.
24절기상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 올해 양력 6월 21일)로부터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 넷째 경일은 중복, 입추 후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 한다.
경(庚)이라는 것은 10간(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중 일곱 번째인 '경'을 뜻하며, 10간과 12지를 조합한 60갑자력인 간지력(干支曆)에서 경(庚)자가 들어간 날이 '경일'이다.
보통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초복에서 말복까지 20일이 걸리지만, 간혹 한달 가량 걸리기도 한다.
10일 간격이던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는 경우인데 이를 월복(越伏)이라 한다.
올해가 바로 월복이 된 해로, 무더위 기간이 예년보다 더 길어질 전망이다.
어르신들 대화 중 '올해는 월복이라 그런지 늦더위가 기승이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내용을 알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삼복은 중국 진나라 때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진나라 덕공이 음력 6월부터 7월 사이 세차례 제사를 지내며 신하들에게 고기를 나눠 준 데서 유래됐다는 것이다.
삼복의 복(伏)자는 사람(人)이 개(犬)처럼 엎드려 있는 모양으로, 여름철 무더위에 사람이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엎드려 퍼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눈 24절기상 북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는 '하지'가 지나면 점차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가을로 접어든다.
그런데도 삼복더위가 이어지는 것에 대해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소나무)을 쓴 안철환은 이같이 설명한다.
"경(庚)은 오행 중에 금(쇠, 金)으로 가을을 뜻한다. 말하자면 해는 하지를 지나 가을로 가고 있는데 지구는 복사열로 달궈져 화(불, 火)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을 기운인 경(庚)이 아직 땅에 강하게 남아 있는 여름 기운을 피해 숨는다(伏)는 뜻이다."
하지로부터 셋째, 넷째 경일 그리고 입추 후 첫째 경일인 초·중·말복이 삼복인 이유는 이렇듯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여름의 더운 기운에 세차례 굴복한다(숨는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기간 무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과 달리 농작물은 왕성하게 자라난다.
'초복에는 벼가 한 마디 나오고, 중복에는 두 마디, 말복에는 세 마디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복은 벼농사를 짓는 곳에선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농번기다.
이러한 탓에 예부터 사람들은 복날 삼계탕이나 개장국과 같은 영양식을 먹고 체력을 보충했다.
제주의 전통적 닭 먹는 날은?
특이하게도 제주에서는 복날 대신 전통적으로 '닭 잡아먹는 날'이 따로 있다.
음력 6월 20일(양력으로 올해 8월 6일)이다.
예부터 이날 닭을 잡아먹으면 몸보신이 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여름을 날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난 풍습이다.
닭을 먹는 이유는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과 달리 옛날 '고기를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소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데 필요한 수단이었던 만큼 언감생심 먹을거리로 꿈도 꿀 수 없는 대상이었다.
돼지는 제주 각 가정에서 화장실 청소부이자 천연비료를 생산하는 유능한 일꾼이었고, 혼례와 초상·대소상 등 집안에 큰일(경조사)이 있을 때만 먹을 수 있는 가장 귀한 음식이라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닭도 귀한 음식이긴 했지만, 소나 돼지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밭일하는 사람들의 몸보신을 위해 제주에선 가정마다 닭을 키웠다.
연초 이른 봄 알에서 부화한 병아리를 집 마당에서 기르다 보면 6월이면 어느새 중닭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닭을 음력 유월 스무날이 되면 두어마리씩 잡아 온 식구들이 나눠 먹었다.
제주에선 왜 이날 닭을 잡아먹었을까.
정설은 없지만, 제주대학교박물관이 펴낸 '할망 하르방이 들려주는 제주 음식 이야기'(허남춘·허영선·강수경 저)에서 저자들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6월에 닭을 잡아먹었던 이유가 농사주기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농사가 중심이었던 제주사회에서 어르신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농사를 하고 놀이를 하며 음식을 먹었다"고 설명한다.
또 "제주 촌로(村老)들은 1월에 나서 6월 중순쯤까지 약 5개월간 자란 닭이 육질도 단단하고, 훌륭한 맛을 낸다고 말한다. 이때를 몸보신하는 날로 정한 것은 실로 합당한 풍속이자 지혜라 할 만하다"고 덧붙인다.
저자들은 이어 제주의 촌로 강상우씨의 인터뷰 내용을 함께 소개한다.
'농사가 딱 끝난 때가 유월 스무날이라. 사람들이 막 버치지(지치지). 여름 농사 콩·조·팥 같은 농사, 고구마 같은 거 그때 딱 끝나. 갈고, 심고. 가을 들어야 거둬들이지만 … (중략) … 망종 되면 선보리라 없다고 해. 농사가 완전히 다 익어버려. 보리 베고 그 시기쯤 농사가 다 끝나면 유월 스무날이 되어. 음력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겨울 농사로 보리, 여름 농사로 조를 심어 먹을거리를 마련했다.
봄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쌀과 달리 보리는 가을에 심어 이듬해 망종(芒種, 양력으로 올해 6월 6일)을 전후로 알곡을 거둔다.
또 양력으로 6∼7월 대개 장마가 끝날 때 맞춰 씨를 뿌려 조 농사 등을 지었다.
이처럼 보리를 수확하고 여름 농사 파종을 마무리하다 보면 음력 유월 스무날이 된다는 설명이다.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은 "제주 사람들에게도 닭은 오래전부터 최고의 여름 보양식으로 인정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삼복의 개념이 없었던 제주 사람들은 복날을 찾아 복달임하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복날'이라는 자체를 모르고 지냈고 먹을 것이 귀했던 지역이었던데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특수성 탓에 언제든 바닷물에 몸을 담가 열을 식힐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보양식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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