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서안지구 대공습, ‘중동 화약고’ 터뜨리나[이세형의 더 가까이 중동]
극우 보수 내각의 ‘안보 제일주의’ 앞세운 전선 확대 조치
서안지구서 군사작전 늘리면 아랍권과 외교 정상화에 치명적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의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
작전 기간 2일, 사망자 수 13명(팔레스타인 12명, 이스라엘 1명), 부상자 120명 이상(팔레스타인 보건부 발표)…
3~4일(현지 시간) 진행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 내 제닌 난민촌에 대한 군사작전 결과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이‧팔 분쟁)은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도 대표적인 갈등으로 꼽힌다. 역사도 길다. 1940년대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둘러싼 충돌은 계속돼 왔다. 그러다 보니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하기 전에는 큰 주목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제닌 사태’도 사상자 수로만 볼 때는 특별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제닌 사태에는 전세계적인 관심이 모아졌다. 언론의 대규모 취재가 이뤄졌고, 중동 외교가의 시선도 집중됐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에서 중동학 박사학위를 받은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교수(한국이스라엘학회장)는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겠지만,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에 큰 변화가 나타나는 일종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온건파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지구에 20년 만에 대규모 공습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2000년대 초반 대대적으로 발생했던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무장봉기)’ 이후 처음으로 서안지구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다는 게 큰 특징이다. 비록 사상자는 적었지만 이스라엘은 최첨단 드론을 동원해 공습을 감행했고, 1000여 명의 지상군을 제닌 일대에 투입했다.
서안지구는 대이스라엘 무력 투쟁을 강조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단체 ‘하마스가’ 관할하는 가자지구와 달리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많다. 서안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도 하마스와 달리 이스라엘과의 대화와 협력을 강조해 왔다.
그 결과, 지난 20여 년 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 충돌은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가자지구에서는 2008년, 2012년, 2014년, 2021년, 지난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대규모 충돌이 발생해 수백, 수천 명이 사망했다. 가자지구에서의 대규모 충돌은 이집트, 요르단, 미국 같은 ‘제3자’가 중재를 나서야 해결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격렬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제닌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에 수백 명의 무장 팔레스타인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지난 6개월간 이스라엘을 겨냥한 50건 이상의 총격이 제닌 지역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제닌에는 다른 서안지구 내 지역에 비해 전통적으로 하마스 지지자가 많다. 2021년에 ‘제닌 여단(Jenin Brigade)’이란 무장단체도 탄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제닌 지역은 수십 년 간 이스라엘에 맞서 무장투쟁을 해온 역사가 있다”고 설명했다.
● 초강경 보수 이스라엘 내각의 ‘전선 확대’인가
하지만 ‘제닌 지역의 위험’ 못지 않게 현재 이스라엘 정부의 초강경 보수 성향이 그동안 주된 군사작전 대상이 아니었던 서안지구도 공격 대상으로 포함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강경 보수파로 분류된다. 그는 이스라엘 최장수 총리로 지난해 12월 세 번째(첫 번째 임기 1996년 6월~1999년 7월, 두 번째 임기 2009년 3월~2021년 6월)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정치적 성공 배경에는 ‘안보 제일주의’, 좀더 구체적으로는 ‘강경한 대팔레스타인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베잘렐 스모트리히 이스라엘 재무부 장관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없애야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 같은 건 아예 없다”는 ‘망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스모트리히 장관은 ‘유대인 정착촌’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유대인 정착촌 정책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에 유대인들의 집단 정착을 장려하는 게 목적이다.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영토 늘리기다. 팔레스타인 진영에서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조치다.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사회는 불법 행위로 간주하지만 이스라엘은 꾸준히 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극우 정당 ‘오츠마 예후디트(이스라엘의 힘)’ 소속인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은 1월3일 이슬람교의 성지인 알아끄사 모스크(사원)가 있는 동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ain)을 방문해 물의를 빚었다. 현재 요르단이 관리 중인 알아끄사 모스크는 누구나 방문 가능하지만 예배는 무슬림만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들은 팔레스타인, 나아가 아랍권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동예루살렘 특히 성전산 일대 방문을 자제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안보 정책을 담당하는 벤그비르 장관의 성전산 방문은 메시지가 명확하다. ‘노골적인 도발이다’, ‘점령자인 것을 과시하는 행동이다’는 비판이 나왔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현재 이스라엘 정부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인적 구성을 감안할 때 ‘서안지구의 반이스라엘 무장 행위에도 가자지구에서처럼 강경하게 대응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는 건 시간문제였다”며 “앞으로 이스라엘 군의 서안지구 내 작전이 더욱 잦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에서 군사작전 못지않게 유대인 정착촌 확장 조치에도 힘을 기울일 전망이다. 유대인 정착촌 확장은 네타냐후 정권의 핵심 공약 중 하나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해 말 취임 선서를 하면서도 정착촌 확장 의지를 밝혔다. 유대인 정착촌은 서안지구 쪽에 집중돼 있다. 제닌 사태 이전에도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둘러싼 서안지구 내 이·팔 갈등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말에도 서안지구 내 정착촌에 5700여 채의 주택 추가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
아랍국가의 대사급 외교관은 “장기적으로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에서 최대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하면서 제닌처럼 강한 반발이 나타나는 지역은 봉쇄하는 식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반발 커지며 가자지구처럼 변하는 서안지구 민심
향후에는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 확장 움직임→팔레스타인의 강한 반발과 무력 투쟁→이전보다 많아지고 강경해지는 이스라엘의 군사작전→대규모 사상자 발생’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서안지구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서안지구에서 제2, 제3의 제닌 사태도 발생할 수 있는 것. 또 서안지구가 가자지구처럼 바뀌는 이른바 ‘가자지구화(化)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서안지구의 전반적인 성향이 급격히 강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서안지구 내 민심이 이미 오래전부터 변화하고 있었다는 평가도 많다. 온건파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지지가 줄어들면 강경파인 하마스가 반사 이익을 얻고 있다는 뜻이다.
성 교수는 “서안지구에서는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도대체 이스라엘과 대화하면서 무엇을 얻었느냐’는 반발감이 이미 커지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제닌 공격 같은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계속된다면 서안지구의 가자지구화는 피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이스라엘의 제닌 공격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장례식에서도 서안지구 내 민심 이탈 현상은 제대로 확인됐다. 이스라엘 영자지인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따르면 제닌 사태 중 사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장례식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부 관계자들의 장례식 참석을 막았던 것이다.
● 서안지구로 전선 확대는 막 시작된 ‘아랍권과 해빙’에 악영향
“지금은 작전을 종료하지만 제닌에 대한 광범위한 조치는 일회성이 아니다. 우리는 제닌이 테러리즘의 안식처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4일 제닌 작전의 지휘를 담당한 기지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분명한 서안지구로의 전선 확대 의지를 표명한 것.
네타냐후 총리는 국익이나 정치적 지향점 못지않게 개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그는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됐고,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사법부 무력화 법안(의회 과반 이상이 동의하면 대법원의 확정 판결도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 포함)’을 추진하다 대규모 시위 사태가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팔레스타인 압박 정책을 통해 지지 세력의 결집을 노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서안지구로의 전선 확대에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다.
무엇보다 네타냐후 총리가 자신의 최대 공적 중 하나로 내세우는 일부 아랍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두 번째 총리 임기 중이던 2020년 9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외교 정상화)’에 참여해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과의 외교 정상화를 이끌어냈다. 현재 이스라엘은 모로코와 수단과도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했다. 궁극적으로 아랍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수교를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2030 엑스포’ 유치 경쟁에서도 이스라엘은 사우디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확대되고 이로 인한 피해가 커질 경우 아랍권의 반발 역시 거세질 수밖에 없다. 모로코는 최근 이스라엘과의 회담을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또 아브라함 협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권 국민들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이 지난해 14개 아랍국가의 3만3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4%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8%에 그쳤다. 또 76%가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전체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네타냐후 총리와 현 이스라엘 내각의 강경한 팔레스타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도 변수다. 바이든 행정부는 꾸준히 유대인 정착촌 확장에 반대해 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집권한지 반년이 넘었지만 아직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못했다.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집권 뒤 반년이 지났는데도 진행되지 않은 건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례적인 일. 바이든 행정부와 네타냐후 정권 간의 거리감이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네타냐후 총리로서는 서안지구에서 더욱 과감한 압박 정책을 펼치고 싶겠지만 아랍권과 미국과의 관계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며 “특히 내년 미국 대선 결과도 이스라엘의 향후 서안지구 관련 정책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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