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가 '망 중립성'으로 경쟁을 약화시키는 방법[PADO]
[편집자주] 한국에서 망 중립성에 대한 논의는 구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KT, SK브로드밴드 같은 국내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 사이의 분쟁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해외 기업 vs 국내 기업'의 구도이다 보니 논의는 한국 기업에 대한 '차별' 등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망 중립성이라는 명분 자체가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흐리고 있다면 어떨까요? 연성(soft) 자율규제를 도입했던 덴마크와 세계적으로 가장 엄격한 경성(hard) 규제를 도입했던 네덜란드를 비교해봤더니 덴마크에서 개발한 앱들이 보다 혁신적이었음을 시사하는 연구가 있습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간 망 중립성(net neutrality), 또는 '오픈 인터넷' 규칙의 핵심 근거는 '혁신'이었다. 공식적 또는 법적 정의가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팀 우는 오픈 인터넷을 혁신을 위한 "중립 플랫폼"이 된 광대역 네트워크로 제시했다. 오픈 인터넷 규칙은 인터넷 트래픽 관리를 위한 일련의 가격 및 트래픽 통제 규칙이다.
망 중립성을 지지하는 단체 '세이브 디 인터넷'은 이렇게 주장했다. "망 중립성이 없다면, 제2의 구글은 절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수십여 국가가 망 중립성과 관련된 인터넷 규제를 10년 넘게 시행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없는 국가들도 있다. 올보르 대학의 커뮤니케이션·미디어·정보기술센터는 바로 이러한 불일치를 글로벌 규모의 자연실험 주제로 삼았다. 실험은 53개 국가의 모바일 네트워크에서 운용되고 있는 모바일 앱을 5년간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통념대로라면 망 중립성 규제가 엄격한 국가에서 더 많은 인터넷 혁신이 나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연구 대상 국가들의 망 중립성 규제를 '연성', '경성', '없음'의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연성 규칙은 가이드라인 제시, 다자간 협의 모델, 핵심 성과 지표를 가진 자율 규제 등을 말한다. 입법과 행정 명령을 통해 만들어지는 경성 규칙은 광대역 네트워크의 가격과 트래픽에 대한 통제까지 포함한다. 광대역 제공업체와의 파트너십 및 우선권 제공 금지, 위반 시 징벌적 벌금 부과 등이 이에 속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와 같이 망 중립성 규제를 시행하지 않는 국가들은 망 중립성에 대해 사후경쟁법을 선호한다.
더 나은 망 중립성 규칙이 더 높은 수준의 혁신을 만들어 낸다는 전제를 시험하고자 우리는 망 중립성 규칙 도입이 각 국가별로 모바일 앱의 혁신을 얼마나 촉진했는지를 집계할 수 있는 데이터 사이언스 모델을 구축했다. 망 중립성 규칙 도입 전후인 2010~2016년 사이 앱 사용빈도와 다운로드 수, 앱 순위, 매출 데이터는 기업용 모바일 앱 스토어 측정 도구 2종에서 가져왔다.
분석 결과, 통계적 측면에서 연성 망 중립성 규칙은 혁신을 촉진한 것으로 나타났다(대한민국, 일본, 스위스 등). 하지만 경성 망 중립성 규칙을 가진 국가(칠레, 캐나다, 브라질 등)에서는 혁신과 관련된 이점이 통계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
천부적 환경이 다른 국가들을 비교해 잘못된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유사하고 모바일 광대역 네트워크는 발전했지만 규제는 다른 국가 2곳의 데이터를 회귀분석했다. 2011년에 '연성' 자율 규제를 도입한 덴마크와 2012년에 가격 차별 금지 등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제를 입법화한 네덜란드다. 연구 대상 기간 중에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앱은 115개, 네덜란드는 102개였다. 앱 출시 이후엔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덴마크 앱의 평균 인기 순위는 42위에서 26위로 상승한 반면, 네덜란드 앱의 평균 인기 순위는 31위에서 42위로 하락했다. 또한 덴마크는 히트 앱 '서브웨이 서퍼'(Subway Surfers)를 해외로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앱은 네덜란드의 상위 앱 18개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매출과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다. 5년여 간 두 국가에서 사용된 해외 앱 중에서 경성 규칙을 가진 국가에서 나온 앱은 20개뿐이었다. 연성 규칙 국가에서 만들어진 앱은 150개, 규칙이 없는 국가에서 나온 앱은 130개였다.
덴마크와 네덜란드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나라 모두 첨단 모바일 네트워크를 4개씩 운영하고 있었고 많은 인터넷 개발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바일 가입과 관련된 상업적 자유도는 덴마크가 더 높았다. 덴마크의 모바일 사업자들은 무료 데이터와 파트너십을 보다 자유롭게 활용해 사용자들에게 차세대 모바일 네트워크 가입을 홍보할 수 있었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망 중립성 규칙 하에서는 불법이었다. 그 결과 덴마크에선 첨단 스마트폰 보급률과 후불제 가입이 늘어났고, 이를 통해 덴마크 개발자들은 자국 시장 내에서 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현재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유럽연합 망 중립성 체제에 속해 있다. 망 중립성 규칙이 시행되기 전에는 상위 20개 인터넷 기업 중 상당수를 유럽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유럽 기업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글로벌 인터넷 시장 가치 순위 53위에 올라 있는 독일의 딜리버리히어로다. 전 세계 인터넷 가치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2% 미만이며, 이마저도 곧 아프리카에 추월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터넷 시장 가치의 3분의 2는 미국의 몫이다.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차단할 수 있다
무료 검색과 SNS에 대항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광고 상품은 무엇이 있을까? 광고를 보면 광대역 네트워크를 무료로 제공하는 건 어떨까. 빅테크 정책 전략의 핵심이었던 2015년 FCC 오픈 인터넷 규칙에는 광대역 네트워크 제공업체의 경쟁 감시 및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FTC의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FCC는 이를 통해 광대역 산업에 특화된 새로운 개인정보 보호 규칙을 만들어, 사실상 광대역 제공업체들이 온라인 광고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FTC의 관할권은 복구되었지만 경쟁을 위한 중요한 기회는 사라졌다.
유럽도 상황이 비슷한데, 스타트업이 빅테크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해 광대역 네트워크의 첨단 기능을 사용하는 게 제한돼 있다. 논문 '(상호간) 망 중립성 역설: 반독점 규제에 대한 사전 연구'의 저자들은 독재자 게임 이론을 활용해 망 중립성을 연구한 결과, "망 중립성 정책의 비호를 받은 빅테크 기업들은 번창했다. 이들은 이제 사실상 망 중립성 원칙을 무시하고 인터넷 시장에서 소규모 기업과 콘텐츠를 인터넷 시장에서 사실상 배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고 결론내렸다. 반독점 연구자 올레스 안드리추크(Oles Andriychuk)는 유럽연합의 광대역 제공업체는 파괴적 혁신을 이룩할 수 없게 돼 있다고 지적하며, 연성 망 중립성 규칙은 경성 규칙에서 나오는 문제를 초래하지 않으면서 긍정적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계속)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subin.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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