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맛, 뭘 넣었지?” 깜짝 놀라게 한 첨가물, 그건 나락이었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Show me the money.”
이제는 민속놀이라고도 불리는 컴퓨터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해본 분이라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치트키입니다. ‘속이다’라는 뜻의 치트(Cheat)와 열쇠를 뜻하는 키(Key)를 합성한 용어인 치트키는 게임을 쉽게 빨리 클리어할 수 있도록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치팅 코드입니다. 스타크래프트의 선풍적인 인기를 기점으로 치트키라는 단어도 게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흔하게 쓰이는 고유 명사가 됐죠.
음식 조합에도 치트키가 존재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단짠’ 조합의 원조격인 수박과 소금,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라면과 김치, 스팸과 흰쌀밥, 떡볶이와 치즈, 삼겹살과 소주까지…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입니다. 와인과 음식의 궁합은 ‘샴페인’이 치트키라고 소개해 드렸습니다. 몽글몽글 입속에서 터지는 기포와 상쾌한 산도, 구수한 토스트 뉘앙스를 가진 샴페인은 어떤 음식과도 찰떡 같은 궁합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좀 다른 치트키 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오스트리아에 와인의 맛을 끌어올리는 놀라운 치트키가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보면 죽음으로 가는 치트키였다는 게 문제였긴 하지만, 마셔본 사람들은 다들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죠. 바로 오스트리아 와인 스캔들 입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을까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우리나라가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1990년대에 오스트리아 와인은 앞서 말한 스캔들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아예 논외의 대상이었거든요. 사건이 오스트리아 와인 산업의 문을 아예 닫을뻔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방증입니다.
사건은 오스트리아의 몇몇 와인 중개업자들이 자국 와인에 약간의 화학물질을 첨가하면서 발생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을 선언하고 전국 방대한 면적의 포도밭에서 대량의 벌크 와인을 생산해 수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이 차차 나아지고, 입맛이 까다로워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중개업자들은 오스트리아 와인의 품질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점을 고민합니다. 그리고 품질 개선을 위해 고민하죠. 하지만 ‘시간의 음료’인 와인의 품질 개선은 단시간에 이뤄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여러 시도 끝에 아주 약간의 화학물질을 첨가만 하면 와인 품질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마치 치트키처럼요.
품질은 어땠을까요? 부동액을 넣은 와인은 확실히 눈에 띄게 품질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살짝 단맛이 가미되고 묵직한 느낌도 들어서, 마치 몇단계 위의 최고급 와인처럼 느껴진다는데요. 화이트와인 그 중에서도 아우스레제(Auslese)나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 등 단맛이 느껴지는 와인을 주력으로 하던 오스트리아 와인에는 안성맞춤인 첨가물이었던 셈입니다.
1985년 8월2일 뉴욕타임즈 1면 기사(Scandal over poisoned wine embitters village in Austria)에 따르면, 부동액이 첨가된 사실을 모른채로 국제대회에서 해당 와인을 맛본 와인심사위원 아돌프 슈밥(Adolf Schwaab)은 인터뷰에서 “일부 재배자들의 와인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바디감을 얻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경이로운 수준의 품질 향상이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디에틸렌 글리콜은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왜 형광색으로 색소를 타고 구토제를 첨가했을까요. 인간이 섭취하면 섭취하면 간에서 맹독성을 지닌 옥살산(Oxalic acid)으로 변하는 위험한 독극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중개업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고요.
와인에 부동액을 넣은 것은 아주 극소수였지만, 신뢰가 무너진 먹거리에 남은 것은 냉정한 현실뿐이었습니다. 몇몇 국가는 오스트리아 와인 전면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고요, 오스트리아 와인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쌓이면서 사실상 와인 산업이 붕괴합니다.
사건이 벌어진 198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인 놀림감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닌대. 왜냐하면 와인에 부동액을 섞어 마시기 때문이야’ 같은 유머가 유행했다고 하죠. 오스트리아와 같은 언어를 쓰는데다, 사건 당시 오스트리아 와인의 주 수출국이었던 독일에서는 ‘와인 한 잔 할래?’ 대신 ‘부동액 한 잔 할래?’라는 말이 유행어로 쓰였다고 합니다.
한 때 와인 수출량 세계 3위였던 와인 강국 오스트리아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치욕스러웠을 겁니다. 게다가 틀린 말이 아니니 반박조차 할 수 없었을테고요.
오스트리아 정부는 1985년 스캔들을 계기로 와인법을 전면 재정비하고, 이듬해인 1986년 오스트리아 와인 마케팅 이사회(The Austria Wine Marketing Board)를 창설합니다. 이에 따라 수확량과 품질이 엄격하게 통제됐고요. 생산자들 역시 이참에 변화하는 유행에 발 맞춰 레드 와인이나 드라이 화이트 와인을 양조하기 좋은 새로운 품종(그뤼너 벨트리너)의 포도 나무를 기르기 시작합니다.
특히 2002년에는 와인 선진국 프랑스를 따라 지역 명칭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새 법률(DAC)도 도입했습니다. 제도는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은 병입 전 정부의 까다로운 검사를 거치고, 일일히 모든 와인병 마개에 오스트리아 국기와 개별 시리얼 넘버를 기입하도록 합니다. 상당히 귀찮고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만, 오스트리아 와인은 이를 통해 조금씩 시장의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와인을 양조하는 포도 품종은 대부분 그뤼너 벨트리너(Gruner Veltliner)라는 포도인데요. 양조 후 숙성 없이 즐기기에도 좋고 숙성 잠재력도 뛰어나 ‘와인계의 엄친딸’ 샤도네(Chardonnay)에 견줄만 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영국의 와인평론가이자 MW(Master of Wine·와인 업계 최고위 자격증, 1953년 생긴 이래 현재까지 30개국 409명 만이 자격을 취득했다)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젠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은 2011년 3월 12일 파이낸셜타임즈에 기고한 칼럼(A new Austrian empire?)에서 그뤼너 벨트리너를 바탕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와인의 우수성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삶에는 굴곡이 있고, 최악의 상황에 한번 쯤은 처하기 마련인데요. 어쩌면 정말 바닥이라며 좌절할 수도 있겠지만, 절치부심 노력한다면 반드시 재기할 방법이 생긴다는 겁니다. 부동액을 넣어 팔다가 걸려서 세계의 조롱을 사던 나라도 수십년 만에 다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을 보면요.
혹시 지금 상황이 조금 어렵고 힘들다면, 이번 주는 오스트리아 와인을 통해 위안을 얻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오스트리아 와인처럼 멋지게 재기에 성공할 여러분의 그날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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