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 입김' 들어가기 쉬운 국민연금의 애매한 정체성 [視리즈]
국민연금기금 쌈짓돈처럼 써
기금운용위 독립 운영하고 있나
정부 영향력 클수록 리스크도 커
우리는 視리즈 '국민연금과 입김' 첫번째 편에서 이번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결과의 쟁점이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했는지 여부'였다는 점을 짚었다. 문제는 보수정부든 진보정부든 국민연금공단의 결정에 입김을 불어넣은 사례가 숱하다는 점이다. 두번째 편에선 이 문제를 분석했다. 1편에 이어 정부의 개입 사례부터 살펴보자.
■ 사례➊ 한국판 뉴딜 = 2004년 노무현 정부는 당ㆍ정ㆍ청 워크숍에서 '한국판 뉴딜' 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은 정부 주도로 건설과 정보기술 분야에 약 1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거였다. 정부는 이 투자에 국민연금기금을 끌어들였다.
당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애초 취지에 맞지 않게 국민연금기금을 잘못 사용하면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면서 강력히 반발했지만, 결국 국민연금공단은 한국판 뉴딜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005년에는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을 개정해 논란을 빚었다. 개정안에는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기금 관리자에게 기금의 여유자금을 관리기금에 예탁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가 관리하고 사용하는 공공자금 관리기금에 국민연금기금을 비롯한 각종 기금을 강제 예탁할 수 있도록 한 거다. 이때도 보건복지부는 반발했지만, 이 조항은 신설됐고 현재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 사례➋ 뉴스타트 2008 =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에는 '뉴스타트 2008' 사업이 문제가 됐다. 이는 정부가 국민연금에 가입한 신용불량자 29만명에게 본인이 낸 국민연금 납부액의 50%를 담보로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 사업이다.
그런데 국민연금기금의 운용계획에 관한 사안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해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 자율성을 해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사업은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위원회를 무사히 통과했다.
2009년에는 정부가 내놓은 '일자리 창출과 경기회복을 위한 투자촉진 방안'에 국민연금기금이 동원됐다. 국민연금공단은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과 함께 기업의 대규모 설비투자를 지원하는 설비투자펀드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수조원의 기금을 투입했다. 같은 해 정부는 4대강 사업에 기금을 투입하려 계획했다가 숱한 비판에 직면하면서 없던 일이 되기도 했다.
2011년엔 정부가 농협 구조개편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국민연금공단에 농협금융채권을 인수하게끔 압력을 넣었다. 이자를 주는 채권을 인수하는 것이어서 국민연금공단 입장에서 손해날 것은 크게 없었다 하더라도 기금을 정책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 사례➌ 朴의 직접 개입 = 박근혜 정부에선 출범 초기부터 기초연금 재원을 국민연금기금에서 끌어다 쓰겠다고 했다가 국민적 반발에 부딪혀 무산됐다. 이후 2015년 정부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에 압력을 넣은 사건이 드러났다. 그동안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만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 사례➍ 文의 공공부문 투자 = 문재인 정부에선 박근혜 정부를 반면교사했기 때문인지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보육이나 임대주택 사업 등 공공부문에 국민연금기금 투자를 늘리겠다고 해 '국민연금 쌈짓돈' 논란을 불렀다.
이처럼 국민연금공단에 위탁된 국민의 보험료(기금)는 수시로 정권의 입맛에 따라 다양한 정책자금으로 쓰였다. 그럴 때마다 국회의원들은 서로를 향해 "국민연금은 정부 쌈짓돈이 아니다"면서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소속된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금을 갖다 쓰기 바빴다.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정부의 결정'이나 다름없다는 두번째 증거는 국민연금공단의 구조에 있다. 현행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국민연금사업을 맡아 주관하는 건 보건복지부 장관이다(제2조). 연금급여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주체는 국가다(제3조의2).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기금의 운용계획이 포함된 국민연금공단 운영계획을 수립해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제4조). 국민연금공단의 전반적인 운영에 있어 정부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기금의 관리와 운용은 기금운용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총 19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는 누가 들어갈까.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기재부 차관, 농림축산식품부 차관,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고용노동부 차관 등 5명이 당연직위원이다.
위촉위원은 14명으로, 사용자 단체 추천 3명, 노동자 대표 추천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농어업인 단체 추천 2명ㆍ자영업 관련 단체 추천 2명ㆍ소비자 단체와 시민단체 추천 2명), 관계 전문가 2명이다.
정부 성향에 따라 최소 8명의 위원은 확보할 수 있고, 2명의 지역가입자 대표나 전문가만 친정부 인사로 확보하면 과반이 된다. 이 위원회의 개회ㆍ의결 정족수가 재적 위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위원 과반수 찬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기금운용위가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긴 어렵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올해 '정부 입김'을 더 강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기금운용위원회 산하에 책임투자와 주주권 행사 기준을 검토하는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 위원직에 정부 입맛에 맞는 인물을 앉혔다. 수탁자책임 전문위 위원은 총 9명인데, 기존에는 기업계 3명, 노동계 3명, 지역가입자 3명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올해 각 단체는 2명씩만 추천하고, 정부가 결정하는 3명의 전문가를 추가했다. 국민연금공단이 운용 방식을 변경해서다. 이는 국민연금공단의 주주권 행사를 관장하는 전문위원회에 정부의 입김이 더 세졌다는 의미다. 한발 더 나아가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규정을 바꿔 기금운용위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가. 우리 정부가 엘리엇과의 소송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과연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은 정말 정부와 관련 없는 것일까. 아니면 중재판정부의 해석처럼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정부의 결정'이나 다름없는 것인가. 전문가들은 대부분 중재판정부의 해석과 같다.
이정우 인제대(사회복지학)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정부가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정책사업을 펼 때 특별기금을 만들어 이 기금에 국민연금기금을 동원했던 건 한두 번이 아니다. 법적으로는 공단과 기금의 운용 방식이 중립을 택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법의 범위를 정부가 한정하기 때문에 별개라고 하기 어렵다."
기금운용위 위원으로 활동한 적 있는 이찬진 변호사(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는 "법적으로 기금운용위는 행정기관 산하의 행정위원회"라면서 "인적 구성이 준사회적합의기구 형태로 돼 있지만,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업의 책임 주체이자 운용 주체인 만큼 정부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보는 게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자, 이제 처음 제기한 문제를 정리해보자. 국민연금공단과 그 산하의 기금운용위원회에 정부의 개입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고, 실제로 입김이 들어간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선 국민연금공단이 아무리 순수한 투자자로서 의결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엘리엇과 같은 투자자들이 꼬투리를 잡는다면 책임을 피하기 힘들다.
국민연금공단이 투자하는 곳이 적은 것도 아니다. 현재 공단이 투자하고 있는 기업만 2021년 기준 1249개에 달하고, 공단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만 521개에 이른다.
박상인 교수와 이정우 교수, 이찬진 변호사 등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꼬집었다. "국민연금공단이 국민이 낸 보험료의 성실한 관리자이자, 순수한 투자자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ISD에 휘말릴 수 있다." 정반대 길을 걷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귀담아들을 만한 조언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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