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2000년 무역흑자국 만든 ‘이것’…나라 망하게도 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7. 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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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4] 미국과 중국, G2 갈등의 이유로 여러 가지 요인이 꼽히지만, 사실 핵심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다. 2022년 기준 미국의 무역적자는 9481억달러로 사상최대를 기록했는데 이중 40%인 3829억 달러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중국이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추어가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이 본격적으로 견제를 시작했다.

180여년전, 당시 글로벌 수퍼파워였던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아편전쟁이라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사실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무역적자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하자 이를 만회하려고 인도에서 생산한 아편을 중국에 팔다가 중국 당국이 이를 막으려하자 의도적으로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2000여년전 당시 세계의 G2라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의 교역에서도 로마는 대규모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이후 유럽세계와 아시아와의 교역, 특히 중국과의 교역에서 아편전쟁 이전까지 유럽은 계속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중국에 유럽인들이 탐낼만한 상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 넘게 유럽인을 매료시켰던 중국의 대표상품은 바로 비단이었다. 비단 교역을 위해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비단길(물론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19세기말에 붙여진 이름이지만)이 생겼고 이 실크로드는 동서문화교류의 가장 중요한 루트였다. 말하자면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기 전 전지구적 거래를 가능하게 한 상품이 바로 비단이었다.

인류 최초의 럭셔리, 중국 비단
기원전 53년의 일이었다. 로마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휘하 7개 군단의 군인들이 유프라테스강 동쪽으로 파르티아 군인들을 맹렬히 추격했다. 그런데 도망치던 파르티아 병사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이런 활쏘기 방식을 ‘파르티안 사격’이라고 부른다.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에도 말을 탄 채 몸을 돌려 활을 쏘는 모습이 있다. 로마인들이 고구려의 궁사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이런 방식의 활쏘기를 ‘고구려 사격’이라고 불렀을 지도 모르겠다.)

화살이 비오듯이 퍼붓자 로마의 추격대대는 추격을 멈추고 방향을 틀었다. 이때 거대한 깃발이 밀물처럼 로마군을 향해 몰려왔다. 일부는 물결처럼 부드러운 그 깃발에 공포를 느꼈고 일부는 구름처럼 가벼운 그 깃발에 매료됐다. 바로 비단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비단이라는 새로운 물건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로마인들은 그 진귀한 물건을 시장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먼저 만났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이라고 여겼던 파르티아인들이 그 놀라운 물건을 직접 생산했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동쪽 무지개 너머의 어떤 신비한 나라에서 만든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그 미지의 나라를 ‘비단 나라’라고 불렀다. 바로 중국이었다.

비단을 짜는 모습을 그린 중국 그림
최근의 중국측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때부터 누에고치로 비단을 만들어 입어왔다. 지난 2017년 중국과학기술대학 연구진은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무덤 세 곳을 조사하던 중, 8500년 전 만들어진 비단의 흔적을 찾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무덤의 주인이 땅에 묻힐 당시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비단과 함께 옷감을 짜는 도구와 동물의 뼈로 만든 바늘 등도 함께 출토됐다고 중국 연구진은 밝혔다. 이는 8500년 전 중국 허난성 자후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비단을 만들고 바느질 해 옷감으로 활용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고품질의 비단을 위해서는 누에 벌레를 선별하고 여기서 실을 뽑는 양잠기술의 발달이 필수적이다. 중국에서는 고대 이래로 양잠 기술을 발전시키고 품질을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사업이었다. 특히 한나라 시절 양잠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

누에고치
로마를 쇠락하게 만든 비단 사치
기원전 34년 악티움 해전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후 로마는 경제적으로 부흥하게 된다. 나일강 유역의 막대한 수확물이 로마로 들어오자 곡물 가격이 크게 하락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소비력이 크게 높아졌다. 로마의 세금 조사원들은 이집트 전역에 파견되어 가혹하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집트로부터 곡물과 세수, 자원이 로마로 들어오자 로마에는 돈이 넘쳐났다. 아우구스투스의 말처럼 로마로 몰려드는 부(富) 덕분에 그는 벽돌로 지어졌던 도시였던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페르시아 넘어 동방 세계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를 지나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육상 교통로에 대한 조사를 시켰는데 그 기록이 <파르티아의 역들>이라는 문서로도 남아 있다.

로마가 동쪽으로 확장할 때 한나라는 서역으로 경계를 확대했다. 한나라 황제들이 중국의 변경을 서역으로 확장할수록 북쪽과 서쪽 유목민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대표적으로 흉노가 한나라의 안전을 위협했다.

흉노와 전쟁을 치렀던 한무제는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내려왔던 중국의 외교정책인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원칙을 그대로 따랐다. 가까이 있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흉노 너머에 있는 국가와 교류하려고 한 것이다. 마침 그때 무제는 월지가 흉노에 패하여 서쪽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을 파견했다.

기원전 139년에 떠났던 장건은 두 번 흉노의 포로가 되는 우여곡절 끝에 13년만인 기원전 126년 장안으로 귀환했다.

장건은 비록 월지와의 동맹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오손에 머무는 동안 대완, 대월지, 대하(박트리아), 안식(파르티아) 등지에 부사들을 파견했다. 이로써 한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아시아로 이르는 외교적인 소통로를 확보하게 됐다. 사마천은 <사기> ‘대완열전’에서 장건의 공을 높이 평가해 그의 업적을 ‘착공(鑿空)’이라고 표현했다. 막힌 산을 뜛어 없던 길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길이 뚫리니 그 길 위로 물건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 바로 한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이었다.

특히 이집트 정복 이후 돈이 넘쳐흘렀던 로마의 귀족층들이 비단에 매료됐다. 로마인들의 비단을 향한 열망과 사치가 얼마나 심했던지 AD 14년 티베리우스는 비단옷을 입는 것 자체를 금지할 정도였다.

로마의 현인 세네카는 비단 열풍에 경악하면서 “비단옷은 로마 숙녀의 몸매도 품위도 가려주지 않으므로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금지할수록 열망은 더 강해지는 법이다. 귀족층에서 유행했던 비단옷이 하층민을 포함한 전 계층으로 확대됐다. 비단 가격도 점점 올라가 금과 똑같은 무게가 될 정도가 됐다.

비단으로 인한 무역 적자는 로마의 경제에도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1세기후반 기준으로 매년 1억 세스테르티우스에 이르는 돈이 로마 경제에서 국경 너머 교역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1세기 중엽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최소한의 계산에 비춰봐도 로마제국은 매년 인도, 비단나라, 아라비아반도에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돈을 흘려보낸다. 이것은 우리가 사치와 여인들을 위해 지불한 대가다. 1억 세스테르티우스는 대략 황금 7톤에 해당한다.”

1억 세스테르티우스는 당시 로마 제국이 연간 주조하는 화폐량의 절반에 이르는 액수이고 로마제국 전체 연간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액수다. 비단으로 로마경제가 휘청거렸고 로마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얘기도 과장만은 아닌 셈이다.

AD 6세기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승려가 속이 빈 나무 지팡이 속에 누에고치를 넣어서 비잔티움으로 밀반출시키는데 성공한다. 동로마판 ‘문익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에고치를 확보한다고 훌륭한 비단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19세기 말까지 비단 산업의 압도적인 경쟁력을 이어갔고, 2000년 이상 중국 무역 수지의 원천이 되었다.

중국, 실크의 저주에 빠지다
1545년 스페인은 안데스산맥의 고원 마을에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잭팟이라고 부리는 포토시 은광을 발견했다. 퍼시픽대학교 역사학자 데니스 O. 플린 교수 등에 따르면 16~18세기 스페인이 포토시광산에서 생산한 은의 양은 1만5000톤 이상이었는데 이것은 전 세계 생산량의 8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캐낸 은의 최소 33%, 최대 50%는 중국으로 흘러갔다.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 마닐라와 중국 푸젠성을 오가는 갤리온 무역을 통해서였다.

아메리카대륙에서 생산한 스페인의 은을 중국으로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였다. 아메리카의 은이 대서양을 건너지 않고 대부분 태평양을 건너자 스페인 국왕은 태평양을 건너도록 허용되는 선박의 수를 1년 2척으로 줄였다. 그러자 상인들은 선박의 크기를 2000톤급으로 늘리고 한번에 싣는 은의 양을 50톤으로 늘렸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 포르투갈 3개국의 동인도회사 연매출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액수였다.

스페인의 상인들이 이처럼 편법을 쓰면서까지 중국과의 무역에 나선 이유는 중국의 비단을 수입해서 유럽에 파는 것이 가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명나라는 은에 굶주려 있었다. 명나라 내부 화폐 제도가 붕괴해서 은이 가장 신뢰할만한 화폐 기능을 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명나라 조정은 관리와 병사들의 녹봉을 모두 은으로 지급했다.

명 왕조는 비단을 얻기 위해 농민들에게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심도록 사실상 강제 조치를 내렸다. 5~10묘(苗)(1묘는 약 666제곱미터)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게는 의무적으로 그 절반을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기르도록 했다. 또 뽕나무를 심지 않는 농민들은 비난 한 통을 납부해야 했다. 조정의 압박으로 중국 동부의 농민들은 야산 전체를 뽕나무 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들과 산이 뽕나무 밭으로 변하는 야산상전(野山桑田0이 된 것이다.

양쯔강 하류에는 비단공장들이 벌집처럼 들어찼다. 오늘날의 중국 선전(深圳)처럼 이곳의 비단공장들은 다른 지역의 일손을 빨아들여 어마어마한 양의 비단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비단은 30~40%의 이문을 붙여 마닐라로 수출했고, 스페인 상인들은 가격을 여기에서 2~3배 올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팔았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지역산 비단의 3분의 1도 안되는 양이었다.

중국산 비단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밀려들자 멕시코에서는 이를 이용한 2차 가공업이 번성했다. 상인들이 멕시코에서 직공과 양재사를 고용해 비단으로 된 다양한 의복을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한 것이다. 요즘 개념으로 하면 비단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밸류체인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을 보고만 있을 중국 상인들이 아니다. 중국 상인들은 유럽에서 유향하는 의복과 소파 커버 등의 샘플을 구해서 최신 스타일의 복제품을 만들어 냈다.

중국이 직접 완제품 생산에까지 뛰어들자 위협을 느낀 유럽의 상인들은 스페인 국왕에게 중국산 비단 원단 수입은 허용하되 완제품 수입은 금지해달라고 탄원했다. 또 중국산 수입품을 모두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멕시코 아카풀코 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의 직접 교역을 봉쇄해달라고 청원했다. 물론 그런 조치를 내려졌다고 비단 거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비단으로 들어온 은은 명나라의 부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명 왕조는 만리장성을 확장하고 새롭게 보수했다. 은의 유입은 국내 상업 활동을 촉진시켜 경제 호황을 불러왔다.

하지만 좋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은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인조편법이라고 하는 은납제를 시행했는데 이것 역시 정치적 악수가 되고 말았다. 은의 액면가가 아니라 무게 단위로 세금을 책정했는데 인플레이션의 은의 가치가 하락하자 당연이 정부에서 걷어들이는 은의 가치 자체가 폭락했고 이것이 왕조의 재정악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은 확보를 위해 비단 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배분한 탓에 국내의 산업 균형이 무너졌다. 역사학자 데니스 O. 플린 교수는 이런 상황을 “명나라 조정이 상업활동과 국정운영에 절실했던 은을 손에 넣기 위해 자국이 가진 생산기반의 몸통을 바쳤다”고 설명했다.

명 조정이 은의 대량 유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발목이 잡혀있는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만리장성 밖에서는 만주족이 힘을 키우고 있었다.

아편전쟁의 모습을 담은 그림
비단의 비극은 청나라에서도 반복됐다. 물론 이번에는 청나라의 잘못이 아니었다. 영국은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홍차를 수입하기 위해서 대규모 무역 적자가 발생하자 문명국가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질렀다. 국가가 직접 마약산업에 손을 댄 것이다.

영국은 인도의 농장에서 키운 아편을 중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많은 홍차와 비단을 사서 갔다. 중국이 아편 중독자로 넘쳐나고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자 청나라의 임칙서는 1838년 청의 흠차대신(欽差大臣) 임칙서는 마약상 60명을 체포하고, 영국 상인들에게 “아편 무역을 중단할 것”과 “‘밀매하다가 적발될 경우 자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것을 각오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그는 아편 2만 1306상자를 압수해 전량 폐기처분했다.

임칙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무역에서 영국이 손을 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영국에 아편을 가져와 영국인들이 아편을 피우도록 부추긴다면, 여왕께서도 크게 분노하시며 이를 제거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바로 ‘아편전쟁’이었다.

실크로드의 정치학
유라시아 대륙은 거대한 하나의 땅덩어리이지만 자연적 장애물에 의해 몇 개의 문화적 구획으로 분절돼 있다. 중국과 인도는 히말라야라는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고, 중국에서 이란으로 가는 길에는 파미르고원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산맥과 고원을 넘어 교류할 수 있는 가느다란 통로를 기어코 찾아냈다. 중국의 서안에서 출발하여 하서주랑이라는 좁은 길을 통과하여 고비사막 안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돈황으로 연결된다. 돈황을 출발해서 옥문관을 통과하면 길이 두갈래로 나뉜다. 북쪽길은 오늘날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지나 유럽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남쪽길인 이란과 이라크 방면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처음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개척된 희미한 길이 왕래가 활발한 무역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이 있는 상품이 있어야만 한다. 한나라 장안에서 사서 로마에서 팔아도 이익이 남을 수 있는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이어야 하고 충분한 이익이 남을 정도로 수요가 많은 상품이어야 한다. 여기에 맞춤한 상품이 바로 비단이었다. 그러니까 비단은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무역로를 열고 동서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만든 촉매제 역할을 했다. 비록 뒤늦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 무역로를 ‘실크로드(silk road)’라고 명명한 것은 탁월했다.

실크로드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1877년에 처음 쓰게 됐다. 당시는 세계 최강인 영국과 신흥 강국인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을 둘러싸고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단순히 무역로의 성격을 규정한 이름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벌어지던 지정학적 분쟁의 의미가 담긴 이름이었다. 이 지역을 장악하는 세력이 동서의 교류를 장악해서 결국 패권을 갖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1904년 영국의 지리학자인 핼퍼드 매킨더는 이 지역을 ‘심장지대’라고 명명했다. 매킨더는 영국을 포함한 서방 해양세력의 전략적 목표는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지대를 장악하는 유라시아 대륙 패권국가 형성을 막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1~2차 세계대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 이란-이라크 전쟁 등 20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펼쳐진 지정학적 갈등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현재도 진행중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현대판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새로운 국가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집권 3기’에 나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5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시안에서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 정성을 초청해 6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재가동을 선언한 셈이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미국의 패권적 질서에 맞서 대국굴기(大國崛起·대국이 일어난다는 의미)를 추구하는 시 주석의 상징적인 패권 전략이다.

하지만 실크로드의 역사는 정치적 의도만으로는 그 길이 넓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장건이 비록 정치적 동맹을 찾기 위해서 처음 길을 뚫었지만 그 길 위로는 비단과 도자기가 오고갔고 낙타와 말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불교와 동방정교와 조로아스터, 이슬람 같은 종교들이 길 위에서 섞였고 여러 정보들도 이 길을 따라 전해졌다. 길은 결국 그렇게 완성되는 법이다.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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