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에서 프랑스 구한 사나이, 노르망디 바다와 이별

김태훈 2023. 7. 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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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인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참전용사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레옹 고티에(1923∼2023)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1944년 6월6일 미국·영국·캐나다 연합군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된 곳으로, 특히 영국군에 속했던 자유프랑스 해군 특수부대원 177명이 상륙한 지점이다.

상륙작전이 끝나고 훗날 고인은 "그때 영국 군인들이 우리한테 '당신들 프랑스인이 앞장서라'라고 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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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작전 참여' 마지막 佛 생존자 고티에
100세로 타계… 바닷가에서 영결식 엄수
"1944년 佛 군인들 상륙한 바로 그 지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인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한 참전용사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레옹 고티에(1923∼2023)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고인의 헌신을 기리는 연설을 했다.

7일(현지시간) 프랑스 언론들에 따르면 지난 3일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티에의 영결식은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해변의 작은 마을 위스트르앙에서 열렸다. 1944년 6월6일 미국·영국·캐나다 연합군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된 곳으로, 특히 영국군에 속했던 자유프랑스 해군 특수부대원 177명이 상륙한 지점이다. 고인은 별세 전까지 이 177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7일(현지시간) 노르망디 해변에서 거행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전용사 레옹 고티에의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생전 얼굴 사진을 보며 관 앞에 서 있다. 위스트르앙(프랑스)=AP연합뉴스
마크롱 대통령은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와 함께 참석했다. 고인을 ‘전설’로 규정한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는 해방의 영웅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고인은 16살이던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프랑스 해군에 입대했다. 이듬해인 1940년 5월 독일은 공격 방향을 프랑스로 돌렸고 겨우 6주일 만에 프랑스는 항복했다. 한때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상대로 호령하던 강대국 프랑스가 순식간에 나치 독일 군홧발에 짓밟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고인은 프랑스가 항복하기 직전 영국으로 탈출했고 대(對)독일 항전을 계속 이어가기로 한 샤를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에 합류했다. 그는 부대장 필립 키에 이름을 따 ‘코만도 키페’(commando Kieffer)로 불린 해군 특수부대에서 활약했다. 1944년 들어 미국, 영국 등 연합국들은 독일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고 프랑스를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했다.
최근 100세를 일기로 사망한 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레옹 고티에의 영결식이 7일(현지시간) 노르망디 해변에서 엄수돼 군인들이 고인이 관을 운구하고 있다. 이 바닷가는 고인이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프랑스 해군 특수부대 동료들과 함께 상륙한 지점이다. 위스트르앙(프랑스)=AP연합뉴스
당시 연합군 수뇌부와 드골 간의 갈등 탓에 자유프랑스군의 주력 부대는 상륙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고인이 속한 해군 코만도 등 프랑스 장병 177명은 작전에 뛰어들었다. 상륙작전이 끝나고 훗날 고인은 “그때 영국 군인들이 우리한테 ‘당신들 프랑스인이 앞장서라’라고 했었다”고 회상했다.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투인 만큼 프랑스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독일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코만도 대원 177명 중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고인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다리를 크게 다쳐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전후 노르망디 해변의 위스트르앙에 정착한 고인은 말년에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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