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일의 노예’ 같아서…” 32살에 모든 걸 때려치웠다
뉴욕 패션위크에 갔다. 200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나는 하이패션에 막 맛을 들인 참이었다. 하이패션은 그러니까, 명품을 말한다. 아니다. 명품이라는 싸구려 단어로 하이패션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이패션은 대중적인 패션을 뜻하는 매스패션(Mass Fashion)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철학이 깃든 고급 패션을 의미하는 단어다.
영화의 세계에도 작가주의 영화와 대중 영화가 따로 있다. 둘은 겹치기도 하지만 분명히 나눌 수도 있다. 자신의 독창적인 영화적 세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감독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작가가 만든 영화는 작가주의 영화다. 하이패션도 마찬가지다. 어떤 디자이너 브랜드 옷은 실루엣만 보아도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이패션은 작가주의 패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 마음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크게 이치에 어긋난 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의 옷, 중고 팔아 새 거 사려 했는데…
내가 하이패션에 빠져든 이유는 작가주의 영화에 빠져든 것과 비슷했다. 옷을 좋아하다 보니 패션잡지를 읽게 됐다. 패션잡지를 읽다 보니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름들이 있었다. 물론 당신도 아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위베르 드 지방시, 이브 생로랑(입생로랑) 같은 전설적인 이름들이 있었다. 꼼데가르송을 만든 일본의 가와쿠보 레이라거나 2000년대 스키니 진을 유행시킨 에디 슬리만 같은 이름도 있었다. 그러다 딱히 유명하지는 않지만 내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을 알게 됐다. 이제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마르탱 마르지엘라나 라프 시몬스 같은 유럽 디자이너들을 발견하게 됐을 땐 정말이지 기뻤다. 그건 영화광인 당신이 미하엘 하네케나 다르덴 형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도 비슷한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애덤 키멀(아담 키멜)이 있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뉴욕의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부상하는 중이었다. 파리·밀라노와 뉴욕은 좀 달랐다. 유럽 디자이너들이 난해하게 작가주의적 옷을 만들었다면 뉴욕 디자이너들은 좀 더 대중적인 작가주의적 옷을 만들었다. 당신은 종종 하이패션 브랜드 패션쇼를 보다 ‘저딴 걸 어떻게 입고 다니라는 거지?’라며 불평을 늘어놓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뉴욕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달랐다. 패션쇼에 올라간 모든 옷은 그대로 매장에 걸어놓고 팔아도 될 정도로 실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개성이 있었다. 당시 부상하던 뉴욕 디자이너들은 톰 브라운, 팀 해밀턴, 토드 스나이더, 패트릭 에르벨, 애덤 키멀이었다. 특히 나는 애덤 키멀의 옷이 좋았다. 그가 만든 옷은 세련되면서도 투박했다. 섬세하면서도 거칠었다. 나는 매년 애덤 키멀의 패션쇼 사진들을 보며 그의 옷을 사는 날을 꿈꿨다.
뉴욕을 처음 가게 된 해, 나는 기적적으로 친구를 통해 뉴욕 패션위크 패스를 얻었다. 그리고 애덤 키멀을 만났다. 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애덤 키멀에게 걸어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 당신의 열광적인 팬입니다. 사진 한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 사진을 도저히 공개할 수가 없다. 샴페인을 마신 내 얼굴은 지나치게 붉었다. 사랑하는 디자이너를 만났다는 기쁨에 붉은 얼굴은 더 붉게 상기됐다. 어쨌든 나는 애덤 키멀의 무뚝뚝한 재킷을 하나 구입했다. 나는 그 옷을 몇년 뒤 인터넷으로 누군가에게 팔았다. 그걸 판 돈으로 애덤 키멀의 새로운 옷을 살 생각이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애덤 키멀은 멈추었다. 경력이 한창 절정이던 2013년을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떠났다.
가족 돌보려 32살에 ‘멈춤’
애덤 키멀은 198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그는 마음에 드는 옷을 찾지 못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옷을 만들어달라 부탁하자 그는 건축학을 때려치우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2005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띄우자마자 애덤 키멀은 빠르게 유명해졌다. 당대 최고의 스트리트 브랜드인 칼하트, 슈프림과 협업을 했다. 포토그래퍼 라이언 맥긴리 같은 힙한 예술가 친구들이 그의 브랜드를 즐겨 입었다. 애덤 키멀은 “예술가는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매 시즌 뉴욕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패션쇼를 꾸몄다. 2005년에서 2013년까지, 애덤 키멀은 차세대 미국 패션을 이끌어갈 뜨거운 이름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때려치웠다. 도대체 왜?
그는 2012년 미국 <지큐>(GQ)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무 압박이 심했습니다. 회사는 성장하고 있었죠. 너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매년 두배로 실적이 뛰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어쩐지 일의 노예가 되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애덤 키멀은 1년을 쉬기로 했다. 당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쉬는 동안 더 실험하고 공부하겠습니다. 그것들을 새로운 디자인과 프로젝트에 응용하고 싶습니다. 휴식이 저를 더 나은 디자이너로 만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1년을 쉰 다음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사라진 디자이너는 애덤 키멀 외에도 꽤 있다. 오스트리아 디자이너 헬무트 랑과 벨기에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대표적이다. 두 디자이너는 자신의 브랜드를 더 큰 회사에 팔고 사라졌다. 애덤 키멀은 아예 브랜드의 문을 닫아버렸다. 더 큰 회사에 좋은 값으로 팔지도 않고 말이다. 이유는 놀랍게도, 가족이었다. 애덤 키멀은 2010년 배우 릴리 소비에스키와 아이를 갖고 결혼했다. 릴리 소비에스키는 열여섯살 때 출연한 블록버스터 <딥 임팩트>(1998)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다. 그는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1999), <글래스 하우스>(2001)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모았지만 2000년대 후반에는 방송계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다. 애덤 키멀과 만난 당시 릴리 소비에스키는 경력의 부침을 겪고 있었다. 애덤 키멀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휴식을 결심했다. 바쁜 삶을 멈추고 온전히 가족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다시는 패션계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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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의미가 달라지는 순간
그는 후회하고 있을까? 멈추지 않았다면 애덤 키멀이라는 이름은 지금 젊은 세대에게도 막강한 브랜드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경력의 절정에 오른 디자이너였다. 패션계의 스타였다. 압도적인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다. 2017년 애덤 키멀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저는 과거에 대해 향수를 갖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금을 살고 있어요. 디자이너로 살던 시절, 저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 그런 건 더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2017년의 나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화가 났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패션계의 정점에 있던 남자가 어떻게 가족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거지? 그의 옷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한순간에 배신하고 돌아서서 “그런 건 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그 인터뷰를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애덤 키멀은 돌아올 것이다. 결국 다시 옷을 만들 것이다.
애덤 키멀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40대 중년이 됐다. 지난 몇년간 내 삶을 뒤흔든 번아웃을 겪으며 나는 깨달았다. 번아웃으로 육체와 정신이 모두 지쳐가면서도 나는 도무지 회사에 사직서를 낼 용기를 내질 못했다. 회사라는 테두리가 사라지면 내 존재는 사라질 것 같았다. 경력은 무너질 것 같았다. 삶은 끝날 것 같았다.
아니었다. 사람은 멈추어도 되는 것이었다. 멈추어도 죽지 않았다. 멈추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멈추는 일이 필요했다. 나는 마흔 중반의 나이로 마침내 애덤 키멀을 이해하게 됐다. 당시 그에게는 경력과 돈보다도 가족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독신인 주제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고 굴복하는 것이냐며 짜증을 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이 든 게 벼슬은 아니지만 너도 나이 들어보라. 정신과 육체의 기능이 절정을 치고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보시라.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 순위가 달라지는 순간은 결국 오고야 만다. 성공의 의미가 달라지는 순간도 결국 오고야 만다.
애덤 키멀의 홈페이지는 아직도 살아 있다.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콘텐츠는 2012년 가을/겨울 컬렉션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그 컬렉션 사진을 보며 이베이로 애덤 키멀이 만든 옛날 옷들을 검색해보곤 한다. 조만간 나는 단단하고 뚝심 있게 만든 그의 재킷을 하나 살 생각이다. 사실 애덤 키멀의 재킷은 나이 들고 살찐 지금의 나에게 더 근사하게 어울릴 것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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