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이 "일본 버르장머리 고치겠다"고 나섰지만 헛일이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지난 주 글에서 1953년 10월에 열렸던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을 살펴봤었다. "철도를 놓고 논을 개간하는 등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게 이로웠다. 일본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궤변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로 4년 동안 한일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분석한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쓰다주크대, 한일근대사)교수는 '구보다 망언'이 '일본 망언의 원형'이라 못 박았다(2010년 <일본 망언의 계보>로 번역된 다카사키 교수의 2002년도 개정판 원서의 제목도 <妄言の原形>이다).
조선 침략으로 전쟁범죄 저지르곤 '은혜' 베풀었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응수(남서울대, 일본사)교수는 다카사키가 '망언의 원형'이라 했던 '구보다 망언'보다 240년쯤 앞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망언 발설자를 찾아냈다. 그래서 정교수 논문의 제목이 '망원의 또 다른 원형'이다. 망언의 주인공은 18세기 초 일본에서 유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아라이는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에서 쇼군(將軍)의 정치고문으로 나름의 영향력을 휘둘렀다. 1711년 새 쇼군이 취임하게 되자, 이를 축하하려고 온 조선 사절단의 격을 낮춰 접대 의례를 간소화했기에, 조선 사절과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4년 뒤(1715) 아라이는 <조선빙사후의>(朝鮮聘使後議)라는 기록을 남겼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다스리게 되면서 일본군에 잡혀온 조선 남녀 중 송환된 수가 3,000명에 이르게 되니, 마침내 양국이 화해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조선 백성들이 전쟁을 잊은 지 100년에 이르렀으니, 일본의 재조(再造)의 은(恩)을 그 나라 군신들은 오랫동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新井白石, 朝鮮聘使後議, 新井白石全集 제4권, 圖書刊行會, 1977. 정응수,「망원의 또 다른 원형」<일본문화학보> 23집, 2004에서 재인용).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으로 말미암아 한반도가 황무지로 바뀌고 숱한 사람들이 잔혹한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이 됐다. 지금 교토에 가면 볼 수 있는 거대한 귀무덤(실제로는 조선인 12만 명의 코무덤)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말해주는 숱한 증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라이는 조선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는커녕 '재조(再造)의 은(恩)'을 베풀었다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여기서 '재조'란 요즘말로 치면 '재건'이란 뜻에 가깝다. 1593년 1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해 일본군을 몰아낸 뒤, 조선 정부가 명나라 조정에 감사의 뜻을 나타내면서 처음 썼던 용어다.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는 조선에 생색을 낼 때마다 '재조의 은'을 들먹이곤 했다. 그런데 전범 국가인 일본이 '재조의 은'을 베풀었다고? 말이라고 내뱉으면 다 말이 아니듯이, 글이라고 끄적거리면 다 글이 아닐 것이다.
후지오, "한일병합에는 무능력한 조선에도 책임 있다"
1980년대 일본의 망언제조기로 일컬어지는 이가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다. 1986년 일본 내각의 문부상(한국으로 치면, 교육부장관)으로 있던 후지오는 보수성향의 월간지에 청전쟁(1894)와 노일전쟁(1904)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당시 조선반도는 청국의 속령이었다. 청국이 일본에 패해,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려고 했는데 그 뒤에 어슬렁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였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됐다"(후지오 마사유키,「방언대신(放言大臣) 크게 외친다」, <文藝春秋> 1986년10월호).
후지오 망언의 요지는 '1910년 한일병합이 없었더라면 조선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속령이 됐을 것이고, 한일병합도 담판과 합의에 따라 이뤄진 만큼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망언은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논란이 됐다. 일본 언론들도 비판적이었다.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 자질이 문제 된다'(요미우리) 등의 사설을 실었다. 일본의 양심적 역사학자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후지오의 발언은 역사를 왜곡하는 전형적인 사례'라 지적했다.
'후지오 망언'으로 한일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총리와 집권당인 자민당 안에선 후지오가 스스로 장관직에서 물러나길 바랐다. 그러나 후지오는 버텼다. 결국 나카소네 총리가 그를 파면시켰다. 일본 정치권에서 장관 파면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자료를 뒤져보니 1945년 패전 뒤 지금껏 장관 파면은 딱 4차례 있었다(가타야마 데쓰 내각 때인 1947년 미곡가격 문제로 히라노 리키조 농림상 파면, 요시다 시게루 내각 때인 1953년 중의원 해산 결의에 불출석했다는 이유로 히로카와 고젠 농림상 파면,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 때인 1986년 망언으로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상 파면, 고미즈미 준이치로 내각 때인 2005년 중의원 해산에 서명 거부했다는 이유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상 파면).
망언에 망언을 멈추지 않은 '망언 제조기'
파면된 후지오는 집요했다. 문제의 <문예춘추> 다음달 호에 또 다른 망언이 담긴 글을 실었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것을 두고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주장했다. 후지오는 그 근거로 '19세기 조선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었다'면서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다'고 우겼다. 오늘날 <반일 종족주의>로 대표되는 '신친일파'들이 내뱉는 주장과 판박이다.
후지오는 같은 글에서 일본이 조선의 기초교육에 많은 예산을 들인 덕에 '조선이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았다'고 일제강점기를 미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파면한 나카소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권을 '용서할 수 없다'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明治)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총리)를 비롯하여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후지오 마사유키,「방언대신(放言大臣) 다시 외친다」文藝春秋, 1986년11월호).
"침략자에게 면죄부를 주려는가"
이런 후지오 망언에 그래도 '타인의 고통'에 배려심이 있고 생각이 깊은 일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부가타 나오키치(아이치대 교수) 등 지식인 102명은 '후지오 발언 문제를 생각한다'는 주제로 시민집회를 열었다. 그런 뒤 일본의 조선침략 원인으로 '무능력했던 조선에도 책임 있다'는 대목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다.
[조선인이 식민지화된 자신의 허약함을 반성하는 것과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의 행위가 비판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별개문제다.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를 같은 수준에서 (책임을) 다루는 것은 침략자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의논임이 분명하다] (다카사키 소지,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 280쪽).
후지오는 '외로운 늑대'처럼 잇단 망언을 혼자 되풀이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 정치권과 극우 집단에서는 '후지오 일병 구하기'에 나섰다. 문제의 우익잡지 <문예춘추>는 '후지오 발언의 파문'이란 제목의 특집 등으로 '후지오의 지론이 옳다'며 손을 들어줬다. 그런 응원에 힘입어 후지오는 일본 각지의 우익집단으로부터 강연 초청을 받았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오른 후지오는 앞의 망언들을 녹음기 틀듯이 되풀이했다.
일본의 조선 통치가 한국 근대화의 밑돌을 깔았기에 발전에 도움이 됐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도 그의 입에서 나온 단골 메뉴다. 이즈음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세미나, 연찬회, 워크샵, 강연회 등등 여러 이름으로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대부분은 소규모의 비공개 모임에서 소리 소문 없이) 내뱉는 친일 발언들은 후지오 망언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침략 의도 없었고, 위안부는 상행위였다"
후지오 문부상 파면 2년 뒤인 1988년, 오쿠노 세이스케(奥野誠亮) 국토청장관이 망언으로 또 다른 논란이 벌어졌다. 오쿠노는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중일전쟁에 대해 말하면서 "당시 일본은 침략의 의도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벌인 자위(自衛)전쟁이었다"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중국 쪽에서 거센 항의가 들어왔다. 발언 나흘 뒤 그는 장관에서 물러났다.
오쿠노는 1972년 문부상, 1980년 법무상을 지낸 일본 정계의 중진이었다. 그의 지난 이력 가운데 1943년 가고시마현 경찰부 특별고등경찰 과장을 지낸 것이 눈길을 끈다. '특고' 또는 '고등계'라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나 사상범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악명 높았던 경찰 부서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붙잡혔던 최연(崔燕)이 특고 출신이다. 특고는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떠올리면 딱 맞는다. 전후 독일에선 게슈타포 출신이 공직에 나서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일본 국왕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눈감아주고 1948년 말 주요전범들을 풀어주는 등 미국의 일본 전후 처리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특고 출신인 오쿠노의 정치이념은 당연히 극우다.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이 군대와 교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신사 참배를 외치며 야스쿠니를 들락거렸던 황도주의자다. 국토청 장관직을 벗어던진 오쿠노는 걸핏하면 망언을 내뱉었다. 1996년 7월4일 자민당 내 극우 성향 의원들의 모임인 '밝은 일본 국회의원 연맹' 결성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를 가리켜 "위안소는 업자가 경영했던 것이며, 그들의 행위는 민간업자의 상행위였다"는 망언이 대표적인 보기다.
같은 자리에서 오쿠노는 "전쟁터에 가는 길에 군의 교통편의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국가(군)가 관여한 사실은 없다. 당시 일본 정부는 여성을 강제적으로 전쟁터에 끌고 가 비도(非道)를 저지르는 그런 심한 일은 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비뚤어진 역사인식 탓이겠지만, 그가 한국(조선)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기에 저런 망언을 할 수가 있나 싶다.
1963년부터 2003년 90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오쿠노는 13회에 걸쳐 중의원에 당선됐다. 유세장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틀에 박힌 망언들을 되풀이해 들었다. 문제는 그런 망언에도 일본 유권자들은 박수를 치며 지지표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망언은 그의 인기와 득표력을 높여준 원동력인 셈이었다.
딱 1년 전인 2022년 7월8일 유세장에서 사제총격 2발에 맞아 죽은 아베 신조 전총리는 같은 극우파 정치 대선배인 오쿠노를 존경했다. 2016년 오쿠노가 103세로 사망했을 때 현직 총리였던 아베는 장례 실행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식 인사말(조사)에서 아베는 "헌법을 (일본) 자신의 손으로 제정해야만 한다는 선생(오쿠노)의 신념이야 말로 자민당의 골격"이라면서, (전쟁 포기를 못 박은)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하라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오쿠노의 뜻을 '확실하게 받들어 계승해 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아베 신조의 극우성향 망언에 대해선 다음 주 토요일에 살펴본다).
고노, "위안소 설치를 요청하고 관리한 것은 일본군"
일본 정치권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 나름의 진정성을 담은 사과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기자들 앞에서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며 처음 얼굴을 드러내면서 일본의 전쟁범죄 실상을 뒤늦게나마 캐묻는 계기가 마련됐다. 김할머니는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일본사람들이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것이 너무 기가 막혀 증언하게 됐다. 살아있는 증인이 여기 있지 않느냐" 며 목청을 높였다(본 연재 13 참조).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에 이어 5개월 뒤인 1992년 1월 일본군이 '위안부' 성노예 강제동원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가 나왔다. 요시미 요시아키(주오대교수, 일본근현대사)가 일본 방위청 산하 방위연구소에 잠자고 있던 극비문서(1938년 일본 육군성과 중국 파견군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에서 찾아낸 증거였다. 일본 정치권에선 더 이상 모른 체 눈감고 팔짱만 끼고 있기가 어렵게 됐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정부 조사 결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많은 수의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위안소의 관리 및 이송에 관해서는 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했지만,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 관헌이 직접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 상황 아래서 처참했다. 본 건은 당시의 군 관여 아래,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www.mofa.go.jp 검색란에 '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 치면 원문 볼 수 있음).
위의 인용문은 1993년 8월4일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담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내놓았던 담화다. 이른바 '고노 담화'로 알려진 이 발표문은 '위안부' 강제동원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은 전쟁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에 이어 서열상 내각 2인자인 관방장관이 담화문을 냈기에 무게감이 살짝 떨어진 듯 비쳐졌지만, 그걸 따질 일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하고 사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노는 담화문에서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가겠다"면서,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동일한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오래 돼 살짝 빛바랜 필자의 메모장을 꺼내 30년 전 그 날 부분을 찾아 들춰보니, '많이 늦긴 했지만, 한 마디로 보기 좋은 모습. 역사는 이래서 발전한다고 말하는가 보다'라고 쓰여 있다. 물론 고노 담화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위안부' 강제동원에 일본 군부가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긴 했지만, '군의 요청을 받은' 민간업자의 역할을 더 강조했다. 마치 '위안부' 제도의 관리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민간업자인양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무라야마 담화'의 한계와 문제점
1990년대 중반 일본 사회당 출신으로 자민당-신당사키가케와의 3당 연립내각의 총리에 올랐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도 과거사와 관련된 중요한 담화를 냈다. 1995년 8월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나온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다. 일본 현직 총리가 패전 50년 만에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식민지 억압과 전쟁 책임, 그리고 전쟁범죄 희생자들에게 대해 공식 사죄를 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크다.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일본이)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잘못 시행하여 전쟁으로 나아가는 길을 걸어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의심할 수 없는 이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인식하고, 여기에서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과 함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의 뜻을 나타내고 싶다"(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www.mofa.go.jp 검색란에서 'いわゆる村山談話' 치면 원문 보임).
일본인들은 자존심 때문일까 '패전'이란 용어보다는 '종전'이란 단어를 흔히 쓴다. 하지만 무라야마 담화 속엔 '종전'보다는 '패전'이란 단어가 더 나온다. '패전의 날로부터 50주년을 맞이한 오늘...'이란 식이다. 사정을 알고 보면,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는 과정에서 내부의 저항이 있었다. 처음 원고엔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부분에서 '침략전쟁'이란 표현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매파들이 못 마땅해 하는 바람에 '전쟁'이 빠졌다. '침략전쟁'이 아니라, 백인 제국주의자들과의 세력다툼 속에 국익을 지키기 위한 '자위(自衛)전쟁'을 벌였다는 삐뚤어진 역사인식의 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라야마 담화가 지닌 한계와 문제점은 또 있다. 그것들은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기록에도 나타난다. 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근현대한일관계)이 핫도리 류지(주오대교수, 일본외교사)의 글「무라야마 담화와 외무성-전후 50주년의 외교」(2007)을 바탕으로 해 쓴 분석을 보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당시 외무성 기록을 보면 무라야마 담화는 (총리)관저 주도가 아닌, 일본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의 주도 아래 작성됐다. (담화는) 포괄적인 반성과 사과를 표명하되, 전후처리 문제를 네 가지로 한정하여 개인보상을 행하지 않는다는 정책적 의도를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외무성의 장기 전략에 입각하여 역대 내각이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하기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도시환, 「아베 총리의 '침략' 부정과 식민지책임」<일본 아베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동북아역사재단, 2013, 157쪽).
여기서 '전후처리의 네 가지 문제'란 △일본군 '위안부' △타이완의 확정채무(미불 급여와 군사우편저금) △사할린 한국인의 영주귀국 △중국에 남겨둔 화학무기 문제를 가리킨다. 식민지 지배와 피해에 대해 '포괄적인 사과'만 할 뿐 실제적인 배상을 외면하겠다는 일본 외무성의 방침이 담화 속에 감춰져 있다. 일본 정부의 이런 완고한 방침은 그 뒤 우리가 기억하는대로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 동아시아의 긴장과 갈등을 불렀다.
일본 외무성의 교활한 장기전략 꼼수
또한 '외무성의 장기전략'이란 매우 교활한 꼼수다.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를테면, 8.15 종전기념일 또는 정상회담 등)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을 내다본 일본 정부 나름의 대응 전략이다. 공식석상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식으로 '포괄적인 사과'를 하며 대충 넘어가는 것이 무난하고도 편리하다는 판단을 일본 외무성이 내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무라야마 담화'는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본 정치인들에게 제법 쓰임새가 많은 편리한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극우 성향의 아베 신조 전총리만 해도 사과나 사죄란 마음에도 없는 거북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8.15 패전 기념일처럼 특정한 날에 어떤 식으로든 공식적으로 반성의 메시지를 담은 담화문을 발표해야 하거나, 한일정상회담 같은 공식석상에서 과거사를 언급해야만 할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일본인들이 흔히 뻔한 상투적인 말을 할 때 쓰는 표현인)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처럼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며 사죄에 갈음하곤 해왔다.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 뒤 가모 다케히코(도쿄대, 국제정치학)교수는 이런 비판을 남겼다.
"지난날 국책을 그르쳐 아시아 각국에 희생을 안겨주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피해보상을 위해 어떤 정책을 시행할 것인지를 밝히지 않은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는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지향적이며, 미래의 행동지침이 결여된 내용이다"(<동아일보> 1995년 8월16일자 기사).
김영삼 대통령, "일본의 버르장머리 고쳐놓겠다"
위의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총리는 나름의 진심을 갖고 담화를 발표했다고 믿고 싶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담화는 '패전 50주년을 맞아 깊은 반성에 입각하여 독선적인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협조를 촉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독선적 민족주의'란 황도주의에 바탕한 국수주의, 또는 지난날 군국주의에 짙은 향수를 지닌 패권적 극우이념을 가리키는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죄 담화를 낸 뒤 두 달도 안 된 시점에 극우 각료의 망언이 튀어나왔다. 1995년 10월11일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총무청장관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에 좋은 측면도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 머리 숙인 '무라야마 담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에토는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망언을 내뱉었다. 일본 시사주간지에 보도된 내용의 요지를 옮기면 이렇다.
"한일병합에 대해 만일 첫째로 책임소재를 묻는다면, 그 당시 도장을 찍은 총리 이완용이다. 싫다면 거절했으면 그만이었다. 일본도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 고등농림학교를 세웠고, 서울에는 제국대학을 세웠다. 교육수준을 높인 셈이다. 기존에는 교육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도로·철도·항만을 정비하고, 녹화사업도 했다"(<週刊文春> 1995년 11월23일號).
이완용이 싫다고 도장 찍은 것을 거절했다면 한일병합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일본을 원망하지 말라고? 조선에는 교육이라는 게 전혀 없었다고? 이런 에토의 망언은 한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중국에 가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장쩌민 주석과의 한중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목청을 높였다. 그 특유의 쇳소리가 섞인 말에서 분노가 묻어나왔다.
"이번 망언을 포함해 건국 이래 일본의 망언이 서른 번은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놓아야 되겠다. 문민정부는 군사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외신기자들이 '버르장머리'란 단어의 뜻을 묻자, 김대통령 수행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고 알려진다. 비보도를 전제로 했던 발언의 파문이 커지자, 에토는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는 내 생각은 잘못이었다. 오해를 부른 면이 있다면 발언을 취소한다"며 스스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극우의 본심이 바뀌긴 어려운 일이다. 해를 넘긴 1996년 1월4일 에토는 기자단과의 신년 간담회에서 자신의 사과 발언을 뒤집었다. "(침략과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를) 왜 반성해야 하는가. 일본은 그렇게 창피한 나라가 아니다"(다카사키 소지, 285쪽). 김영삼이 "일본의 버르장머리 고치겠다"고 나섰지만, 쉽지 않을 일이다.
우경화 흐름 속 빛바랜 '고노-무라야마 담화'
'무라야마 담화' 뒤 3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일본은 무라야마가 지적했던 '독선적인 민족주의'를 배척하기는커녕 보수 우경화 흐름을 가속화해왔다. 1996년 1월 자민당-사회당-사키가케(자민당의 분당) 연립내각이 무너지고 무라야마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2011년 간 나오토 총리의 짧은 민주당 집권 기간을 빼면) 지금껏 자민당의 독주 체제 속에 우경화가 대세를 이루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고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일본이 강제동원 등 전쟁범죄로 얼룩진 과거사를 반성하면서 역사연구나 역사교육에서 전향적인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왔을까. 안타깝게도 대답은 '아니오'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가질 못하고 오히려 퇴행의 길을 걸어 왔다. 일본의 자민당 장기집권과 우경화 흐름 속에 과거사 반성과 사죄는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 됐다.
일본의 자민당 집권세력은 입으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휴지처럼 여긴다. 이를테면, 아베 신조는 총리로 있으면서 하루는 담화 계승을 말했다가, 다른 날엔 "그런 담화는 한국 정부와의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깎아내렸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 편지를 써서 전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잘라 말하기도 했다. 현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의 역사인식도 아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자는 사람들에겐 '자학사관'을 지녔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이즈음 일본의 모습이다.
글을 쓰다 보니 또 길어졌다. 이번 주에 다루기로 했던 아베 신조의 사과-망언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의 문제점, 아소 다로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이 망언을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아울러 그들의 망언과 관련해 우리 한국인에겐 잘못이 없는가를 짚어본 지식인 리영희의 분석을 다음 주 토요일에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비정규직 '1박 2일 야간 문화제' 예고…또 '경찰력' 투입하나
- 총파업에 엄포 놓는 이정식 "관용 없이 법과 원칙 대응"
- 미, 우크라에 '민간인 살상 악명' 집속탄 보낼 듯
- '오염수 괴담'이라는 국민의힘, 文정부땐 "오염수 배출 방지해야"
- 조선 시대 '균형외교' 설계자, 역사소설로 부활한 <장만>
- IAEA 오염수 보고서, 참여 일부 전문가 '우려' 표명했다
- 진보-좌파정당, 스스로 연대연합의 구체적 방식과 방안 마련해야 한다
- '평행우주' 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어느날 하루 일과
- 오염수만이 문제가 아니다
- 윤석열 정부, '4대강 보'가 기후위기 유일 해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