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랑캐] ‘제왕적 대통령’을 어떻게 통제할까?
“인사권, 행정명령, 뒷거래, 그리고 공작정치. ○○은 이 모든 방편들을 동원해 국가정책을 대기업과 부유층을 배 불리기 위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언론의 비판과 의회의 견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 책임 면제, 기밀 유지, 법안 거부, 의회 출석 거부 등의 특권이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은 ‘대통령제가 헌법 위에 군림한다’고 봤다.”(김일년, ‘제왕적 대통령제란 무엇인가?’, 2020년)
이 문단의 주어는 ‘닉슨’이다. 1973년 미국의 역사가인 아서 슐레진저 2세는 현재도 자주 회자되는 책인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보여준 문제점을 윗글처럼 지적했다. ‘제왕적 대통령’은 한국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은 모두 제왕적 대통령들이었다. 슐레진저는 “대통령의 책임성을 희생하면서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헌법적 균형을 무너뜨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불릴 만하다”고 설명했다.
닉슨에서 비롯한 `제왕적 대통령제’
그러면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은 어떨까? 역시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인 박정희·전두환에 맞섰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런 평가를 피하지 못했고 이명박·박근혜, 심지어 문재인 전 대통령도 그런 평가를 받았다. 대한민국 역사상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웠던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뿐이다. 그는 제왕적 대통령에서 벗어나려 노력한 대통령이었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일까? 당연히 그렇다. 제왕적 대통령의 가장 강한 징후는 ‘의회와 야당에 대한 무시’인데, 윤 대통령한테서는 그 점이 명확하다. 윤 대통령은 여당이 의회 소수당임에도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에 협력을 구하지 않는다.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려면 법률을 제정, 개정해야 하는데 야당에 도움을 요청하기는커녕 쉽게 야당을 비난하고 공격한다.
예를 들어 2023년 6월28일 윤 대통령은 한국자유총연맹 행사에서 자신도 참여했던 민주당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이라고 비난했다. 대선 기간인 2021년 12월28일엔 민주당 이재명 당시 대선 후보를 “확정적 중범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후보”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 민주당의 ‘확정적 중범죄자’ 이재명 대표를 집권한 지 1년2개월이 되도록 만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세상을 흑백으로 가르는 검사의 태도다.
또 윤 대통령은 2023년 4월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 5월16일 간호법 개정안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는 이유로 의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했다. 앞으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나 방송법 개정안도 야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의회·야당 무시가 가장 강한 징후
주권자인 시민에 대한 태도도 야당을 대하는 것과 같다. 윤 대통령은 2023년 3월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제3자 변제를 발표하고, 5월 노란봉투법과 방송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예고하면서 “지지율이 1%가 되더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민주주의사회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1%가 된다면 그 직책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촛불시민 혁명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저 지지율은 4%였다. 통상 대통령은 시민의 상당한 지지를 바탕으로 일한다. 만약 시민의 높은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야당과 의회를 찾아가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그런 설득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이 나오기 쉬운 정치적 토양이라는 평가가 있다. 한 원인은 의회주의의 전통이 약한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은 의회이지만,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의 유산으로 행정부가 유난히 강하다. 다른 원인은 중앙집권의 전통이 강한 점이다 . 한국에선 지방자치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모든 결정권이 서울의 대통령과 중앙행정부 , 중앙 의회 ( 국회 ) 에 몰리는 경향을 보인다 .
대통령제를 만든 미국과 한국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이다. 미국은 영국에서 유래한 강력한 의회를 갖고 있다. 의회를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말할 정도다. 또 미국은 연방국가로서 지방정부의 권한이 강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국내에서 힘을 갖게 된 것은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전국적 과세권을 처음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이를 견제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임기를 매우 경직되게 보장하고, 특히 한국은 5년 단임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적 잘못에 대해 다음 대선에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잘못한 대통령을 임기 중에 끌어내리는 방법으로 탄핵이 있는데, 탄핵은 조건과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또 대통령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탄핵은 허용되지 않고, 헌법이나 법률 위반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반면 의회중심제(내각책임제)에서 총리는 의회와 행정부를 모두 지배하지만, 리더십을 잃으면 그 정당이나 의회에서 쉽게 불신임된다. 통상 불신임될 위기에 놓인 총리는 스스로 사퇴한다. 한국 사회가 의회중심제였다면 윤 대통령 같은 총리는 임기를 지속할 수 없다. 또 윤 대통령처럼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총리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의회중심제에선 총리가 되기 전에 먼저 의원과 장차관 등 다양한 정치 경험을 쌓아야 하고 그 정당에서 리더가 돼야 한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나왔다. 국회에선 국회의장 산하에 여러 차례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가 만들어져 개헌안을 내놨다. 대부분 의회 권한을 강화하고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이었다. 2018년엔 문재인 대통령도 현재의 대통령제를 개선하는 개헌안을 내놨지만 국회에서 무산됐다. 학계도 분권형 대통령제나 의회중심제 개헌안을 여러 차례 내놨으나 공론화되지 못했다.
대화·타협하는 대통령 나와야
과연 제왕적 대통령제를 없애고 좀더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만들 길이 있을까?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정치학)는 “먼저 여야 정당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정치개혁이나 개헌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현재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여야 관계를 개선하려면 상대 당과 대화, 타협하려는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2005년 대연정을 제안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그런 지도자는 자취를 감춘 상태다”라고 말했다.
참고 문헌
강원택, <대통령제, 내각제와 이원정부제>, 인간사랑, 2006년
김일년, ‘제왕적 대통령제란 무엇인가?-그 기원에 대한 성찰’, 2020년
박상훈, <청와대 정부>, 후마니타스, 2018년
이관후, ‘한국 정치의 맥락에서 본 개헌의 쟁점과 대안: 제왕적 대통령제와 분권형 대통령제’, 2020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오랑캐처럼 자유로운 눈으로 세상사를 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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