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벨트 블루’마저 잊게 했던, 0대 15의 고독

한겨레 2023. 7. 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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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오늘하루운동 _ 주짓수
양민영 작가가 상대 선수에게 기무라 락(상대의 손목을 고정시킨 채 어깨를 꺾는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 윤성빈 제공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어릴 때 아빠 차에 타면 지겹도록 반복되던 노래였다. 저 아저씨는 왜 울부짖고 아빠는 왜 저런 노래를 좋아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30년이나 흘러서 그 가사처럼 외로워질 줄이야. 탈의실에서 모두를 놀라게 하는 멍투성이가 되어, 극심한 피로에 정신이 흐릿한 채로 돌아다닌 지 4주째에 접어들었을 때 귓가에서 느닷없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재생됐다. 정말이지 외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나를 이런 처지로 내몬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주짓수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결심했던 나에게 암바라도 걸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절대 대회 타입이 아니다. 경쟁이 난무하고 승패가 갈리는 게 스포츠라지만 심각한 겁쟁이인 탓에 경쟁을 일단 피하고 본다. 게다가 내 나이는 만으로 깎아도 마흔이다.

‘블루벨트 블루’ 반전이 필요해

대회에 관심 없던 이유가 또 있는데 주짓수 대회가 스포츠 주짓수의 룰을 기반으로 겨루는 게임이라는 점이다. 스포츠 주짓수는 특정 포지션과 기술을 점수로 환산한다. 나는 스포츠가 아닌 스트리트 주짓수 계열로 주짓수에 입문했다.(스트리트 주짓수는 실전에서 통할 방어를 더 중요시한다) 주짓수 대회에 나가서 싸우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으면 스포츠 주짓수 스타일을 새로 익혀야 했다. 손해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내가, 무엇 하러 불리한 게임에 뛰어들겠는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한 배경에는 ‘블루벨트 블루’가 있었다. 블루벨트 블루는 블루벨트 단계에서 겪는 회의와 슬픔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많은 이가 이 단계에서 수련을 그만둔다. 오죽하면 ‘블루벨트는 포기하는 자의 블랙벨트’(기술의 완성 단계에서 받는 벨트)라는 말이 있을까. 때마침 나에게는 블루벨트 블루를 이겨낼 새로운 동기가 필요했고 그래서 선택한 게 주짓수 대회였다.

그렇다면 연습해서 경기를 치르면 될 일이 아닌가. 국가대표 선발전도 아니고 속된 말로 ‘진지 빨’ 이유가 뭔가?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몸무게를 감량하며 체력을 끌어올리고, 부족한 기술을 연습하고, 취약점에 관해서 지적받고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더 이상 쿨할 수 없었다.

한도를 웃도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의 무게가 계속 불어났다. 가상의 적이 두렵고 이길 자신이 없고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무자비한 감정의 지배가 힘들어서 훈련이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엄청난 지배력은 이미 골백번도 더 패배한 사람의 그것 같은, 짙은 자괴감을 매일 안겨줬다.

또 그처럼 많은 걸 바쳤음에도 대회는 더 많은 걸 요구했다. 가진 걸 다 내놓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가진 게 없으면 빚이라도 끌어 쓰라고 겁박했다. ‘네 모든 걸 걸어. 그게 싫으면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어리석은 결정을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운명의 날이 밝고 드디어 매트 앞에서 상대 선수와 만났다. 나보다 체구가 작고 미성년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려 보여서, 줄곧 상상했던 강력한 적과는 괴리가 있었다. 경기 시간은 6분, 그간 ‘사정 따위 봐주지 말고 죽일 듯한 기세로 싸우라’고 세뇌당했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저렇게 순진한 얼굴을 한 사람을 상대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경을 벗고 매트 위에 서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시작과 함께 무섭게 돌진했고 그동안 상대의 힘과 압박에 대비해서 연습한 것과 반대로 움직임이 매우 빨랐다. 공격과 방어를 자유자재로 전환하는 동시에 탄력적이었다. 나중에 듣기로 이번이 네 번째 출전이라니, 처음인 나와 비교하면 여유도 넘쳤다.

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점수를 허용하고 또 허용했다. 솔직히 말하면 왜 점수를 잃는지도 몰랐다. 급하게 스포츠 주짓수의 룰을 익혔으나 점수까지 계산하며 훈련하기에는 준비 기간이 부족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서 모니터에 표시된 스코어를 보니 자그마치 15 대 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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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대 15…그냥 끝낼 수 없었다

“3분 남았어!” 상대편 코치가 크게 외쳤다. 순간 앞면에서 망한 시험지를 뒤집었더니 기출 문제가 줄줄이 나타난 것처럼 반가운 허점이 눈에 들어왔다. 팔 하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마침내 ‘기무라 락’(상대방의 손목을 붙잡아 고정시킨 상태에서 어깨를 뒤로 꺾는 기술)을 잡았을 때 나는 전율했다. 서브미션(상대에게 항복을 받을 수 있게끔 유도하는 공격 기술)만 성공하면 점수와 상관없이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기무라 락으로 항복을 받기 위해서 팔을 당기고 있다. 윤성빈 제공

도전에 따른 대가로, 가진 걸 전부 걸고 빈손이 됐을 때 마지 못해서 고안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나를 백지로 만들어서 남의 것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는 거다. 그 사람의 수련 기간, 실력의 유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엔 관심도 없던 사람이 스파링하는 모습까지 유심히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걸 죄다 따라했다.

‘기무라 락’은 그때 흡수한 기술 중 하나였다. ‘무자비하게 마무리하라’던 가르침대로 적의 귀여운 얼굴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손톱이 부러지도록 팔을 잡아당겼다. 주짓수 수련자들이 쓰는 표현대로라면, ‘팔을 뽑기만 하면’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순간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상대 선수도 ‘기무라 락’을 방어하는 법쯤은 알고 있었고 나에겐 이 기술을 노련하게 마무리하는 노하우랄까, 경험치가 부족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짜 이유’라는 건 없다. 수백억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트라이커도 결정적인 찬스 앞에서 공을 날려버리는 게 스포츠다.

결국 나는 무참히 패했다. 이기는 순간의 희열을 맛볼 기회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대신에 고독하고 험난했던 과정이 온전히 내 것으로 남았다. 특히 서브미션의 순간은 블루벨트 블루마저 잊게 할, 고귀한 선물이다.

이제 누군가는 냉소할 차례다. 이기지도 못한 경기에 무슨 영광이 있느냐고. 하지만 아무리 구구절절 설명한들 내가 하는 말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건 킬리만자로에 오르는 표범처럼, “고독과 악수”해 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다.

양민영 작가

사회적기업 운동친구의 대표이며 「운동하는 여자」를 썼다. 페미니즘과 여성의 운동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못 하는 일에 도전하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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