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서민의 애환, 최후의 '시민아파트'에 쌓인 50여 년의 흔적 [이한호의 시사잡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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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역 5분 거리 가파른 경사에 위치한 남산을 앞마당 삼아 높이 솟은 아파트가 있다.
정부는 1968년 6월 첫 시민아파트인 '금화시민아파트'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400곳이 넘는 다른 시민아파트가 전부 철거되는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낡고 을씨년스럽게 변했지만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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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역 5분 거리 가파른 경사에 위치한 남산을 앞마당 삼아 높이 솟은 아파트가 있다. 연식에 비해 고층인 건물과 남산 자락의 고도가 더해져 그 육중함이 인접한 건물들을 압도한다. 한쪽 획이 긴 ‘ㄷ’ 모양으로 한 동이 두 번 꺾여 있는 이 독특한 주택은 급성장한 도시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이곳은 1970년 5월 준공된 ‘회현제2시민아파트’, 마지막 남은 시민아파트다.
비슷한 이름의 ‘시범아파트’와는 다르게 시민아파트라는 이름을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비록 같은 공공주택 정책 사업이지만 시작과 끝 모두 어두웠던 시민아파트가 급속도로 추진된 만큼이나 빠르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까닭이다.
중산층을 위한 현대식 공동주택 보급을 목적으로 한 시범아파트와 달리 시민아파트는 당시 13만 가구 넘게 불어난 무허가 주택(판잣집)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건설됐다. 정부는 1968년 6월 첫 시민아파트인 ‘금화시민아파트’ 공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부터 3년간 2천여 동의 아파트를 짓는, 현대 기준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추진된 역점사업이었다.
군부정권의 군대식 행정문화에 당시의 부족한 안전의식이 더해져 단기간·저예산으로 지어진 시민아파트의 태반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었다. 1970년 4월 지반이 통으로 내려앉아 무너진 서울 마포구 ‘와우시민아파트’에서 3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다치며 시민아파트 건립은 사업 시작 1년 반도 안 돼 전면 중단됐다.
와우아파트 붕괴 후에도 이미 공사가 진행된 단지들은 골조 등을 보강하는 식으로 완공됐는데, 회현시민아파트도 이 중 하나다. 상대적으로 후기 아파트인지라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인 개별 화장실과 중앙난방이 도입됐고 평수도 전용 11평(36.36㎡)으로 다른 시민아파트 대비 3평가량 넓게 지어졌다. 단지 가운데에는 장독을 묻을 수 있는 중앙정원이 있고 긴 구조 아래에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도 마련돼 있다. 400곳이 넘는 다른 시민아파트가 전부 철거되는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낡고 을씨년스럽게 변했지만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회현시민아파트도 그간 철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번번이 무산됐다. 2004년 안전진단 D등급을 받은 후 철거가 추진돼 2006년 보상계획 공고까지 나왔지만 끝내 주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박원순 전 시장 재임 당시 도시재생 정책의 일환으로 2016년 청년예술인 임대주택(아트 빌리지)으로 리모델링이 추진됐으나 역시 주민 동의가 저조했다.
2021년 서울시의회가 아트 빌리지 리모델링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시 문화본부가 오세훈 시장에게 해당 건물이 ‘부실시공으로 보존가치가 없다’는 취지의 보고를 올리며 철거로 다시 정책방향이 바뀌었다. 철거계획이 확정된 지난해 11월 기준 53가구가 아직 거주하고 있는 회현시민아파트는 올해 10월까지 완전히 비워진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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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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