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속에서 피어난 열매, 달지 않아도 상큼해 [ESC]

한겨레 2023. 7. 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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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_ 살구와 와인베리
스미스소니언 식물 연구소 주변 숲에서 열매를 맺은 와인베리.

6월 하순부터 7월 사이 우리나라엔 장맛비가 내린다. 어릴 때 어머니는 자두·살구·복숭아의 수확 시기가 장마와 겹칠 수 있으니 물을 잔뜩 먹어 싱거운 걸 사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일러주셨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도 종종 물맛밖에 없는 과일을 잘못 사 한탄하셨다. 자두·살구·복숭아는 모두 장미과, 벚나무속 식물이다. 과육 중앙에 단단한 한 개의 씨가 있는 닮은 구조를 가지고, 봄엔 화사한 꽃이 나무 가득 피어 과수원의 봄을 알려주는 식물들이다. 이 봄꽃들이 한여름이 시작되고 장마 전선이 오가는 시기 열매를 완성하는 것이다.

여름철 식물, 주목받지 못하지만…

나는 어릴 때 유독 살구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살구를 실컷 먹여주고 싶어 살구나무가 있는 동네 어르신 집에 나를 데려가셨다. 할머니 혼자 사는 그 집엔 오래된 살구나무가 있어 매년 살구가 쏟아졌다. 지붕과 마당에 떨어져 터지는 살구는 할머니에겐 골칫거리여서 할머니는 우리에게 마음껏 살구를 따가라고 하셨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 며칠간 계속된 후 따면 살구는 꿀맛이었지만, 며칠 비가 내리쏟아진 뒤 살구를 따면 같은 나무에서 딴 살구가 맞을까 싶게 싱거웠다. 그러나 나는 그 싱거운 살구도 곧잘 먹었다.

장마 때 싱거운 자두·살구·복숭아를 먹는 건 자연과 하나 되는 이상한 만족감이 있었다. 단맛과 향긋함이 부족한, 물기 가득 머금은 과일에서 장마를 맛본다고 할까. 물맛 나는 과육을 씹으면 창밖으로 쏟아지는 장맛비를 먹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온몸으로 장마를 느끼는 그 순간은 입속 달콤함과 다른 감동이 있다. 장마 때 싱거운 열매 맛은 열매가 물을 많이 머금은 게 아니라 사실 부족한 햇빛의 영향이 크다. 햇빛이 부족하면 식물이 충분한 당분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물맛은 나와 계절이 하나 되는 묘한 충만함을 준다.

7월은 녹음이 우거지는 시기이지만, 식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봄보다 줄어드는 것 같다. 봄에 반짝이던 연둣빛 새잎들이 단단해지고 초록으로 짙어지면 우리를 둘러싼 온천지 식물들이 어느새 당연한 배경으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봄에 환호했던 꽃과 새싹의 향연은 사라졌고 마치 1년 내내 푸른 잎이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었던 것 같다.

뜨거운 햇빛과 쏟아지는 장맛비를 피할 나뭇잎 가득한 나무가 새삼 눈에 띄고 반가울 때도 있지만 더위와 빗줄기, 숲속 날벌레들은 숲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식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가을 단풍과 가을걷이를 보며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식물은 언제나 부지런히 변화무쌍하게 자라고 있다. 나는 식물이 우리의 눈길을 강하게 사로잡지 못하는 여름의 시작, 이 시기에 등장하는 자두·살구·복숭아가 고맙다. 봄의 결실을 보여주는 이 과일들은 지금도 식물이 아름답다고, 숲으로 오라고 알려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봄꽃을 피운 이후 끊임없이 이어진 식물의 수고가 뙤약볕 아래 달콤함으로, 장맛비 아래 비의 감동으로 돌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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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동물, 귀화식물에 환호하다

시장에서 만나는 이 과일들뿐 아니라 숲속에도 한여름을 앞두고 열매를 키워낸 식물들이 있다. 나는 며칠 전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 숲속을 거닐며 산딸기 종류인 와인베리(wineberry)를 땄다. 4년 전 선임연구관님이 와인베리를 가득 따서 잼을 한번 만들어 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그 후 나도 언제 한번 손안 가득 와인베리의 붉은 열매를 따보고 싶었다. 과학적 접근, 전원생활, 수확의 기쁨, 자연에 대한 감사,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40년 동안 연구한 숲속에서 작은 산딸기를 따는 할아버지 과학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과학자는 오랜 시간 식물과 숲을 연구했지만, 내가 옆에서 관찰하며 느낀 건 연구라는 표현보다 그가 오랜 시간 식물과 대화했다는 게 적절한 것 같다. 자신이 사랑하는 식물과 친해지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연구를 위한 게 아니라면 숲속에서 자연물을 가져오지 않는다. 숲에 있는 모든 건 자연의 순환을 이루는 고리이니까. 그러나 그때 그는 숲속에서 하나의 순환고리였다. 그가 숲속에서 산딸기를 따고 맛보는 모습은 인간의 채집활동이라기보다 내가 숲속에서 만난 사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나도 그걸 느끼고 싶었다.

와인베리는 한국에서도 자라는 식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 한국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한국 이름은 붉은가시딸기 혹은 곰딸기다. 한국·중국·일본이 원산지인데 관상용으로 미국에 들여왔다가 야생화되어 미국의 귀화식물이 되었다. 귀화식물은 다른 나라를 ‘침략’해 원래 살던 종들을 밀어내고 세력을 넓히기 때문에 종종 그곳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귀화식물 중 많은 종이 인간에 의해 옮겨졌고 그들은 낯선 곳에서도 용감하고 아름답게 자란다. 와인베리는 길가와 숲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며 세력을 넓혔고 지금은 여러 종류의 미국 산딸기들과 함께 미국 동부 숲속에서 덤불을 이루며 살고 있다. 작은 키는 동물들이 접근하기 쉽고 붉은 열매는 탐스럽다. 열매를 감싼 빨간 털과 가시가 달린 꽃받침이 위협적이지만 열매가 붉게 익을 때면 활짝 펼쳐져 동물들에게 열매를 내어준다. 와인베리의 맛은 미국 동물들의 입맛에도 맞았다. 여우, 다람쥐, 주머니쥐, 흑곰, 토끼, 너구리, 많은 종의 새들에게 먹이가 되고 동물들은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씨앗을 멀리 퍼뜨려주고 있다.

한여름의 문턱, 한 알의 열매를 먹는다. 열매는 따가운 햇빛, 후텁지근한 무더위, 축축한 장맛비, 숲속의 날벌레에게 지친 우리에게 상큼한 쉼표를 준다. 내가 먹은 열매가 녹음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 또한 그 맛에서 여름의 햇빛, 더위, 비, 곤충의 수고를 생각한다. 열매를 먹는 숲속 동물들처럼 우리가 태초 자연에서 어떤 순환고리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인지 깨닫는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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