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준의 피겨 퍼포먼스] 소트니코바, 다시는 나오면 안 될 '올림픽 챔프'로 남나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잔영처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아델리나 소트니코바(27, 러시아)도 그런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때와 장소는 12년 전인 2011년 강원도 강릉이었습니다. 당시 강릉에서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스케이팅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습니다.
여자 싱글 우승 후보는 소트니코바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26, 러시아)였습니다. 다소 차갑고 도도하게 보이는 툭타미셰바와는 달리 소트니코바는 잘 웃고 기자회견장에서 매우 자신감 있게 말하는 소녀였습니다. 이 대회에서 툭타미셰바는 실수로 무너졌고 소트니코바는 안정적인 경기를 펼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인터뷰에서 "김연아(33)를 아는가? 그를 어떤 선수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질문했습니다. 소트니코바는 "분명히 김연아를 안다. 그녀는 훌륭한 선수고 트리플 + 트리플 콤비네이션 점프를 정말 쉽게 잘 뛴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김연아의 올림픽 2연패 경쟁 상대가 소트니코바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소트니코바는 러시아 피겨의 기대주였습니다. 주니어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인 만큼 시니어에 데뷔할 때 적지 않은 주목도 받았죠. 그러나 소트니코바는 러시아 피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소치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율리야 리프니츠카야(25, 러시아)가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프니츠카야는 여자 싱글에서 잦은 실수로 무너졌죠. 리프니츠카야가 메달에서 멀어지자 '갑툭튀'한 이는 소트니코바였습니다.
상식이라는 선에서 벗어난 소트니코바의 '올림픽 금메달'
한 인물의 진정한 면모나 특정 사건의 투명함을 따질 때 중요한 점은 '일관성'입니다. 그 인물이나 혹은 특정 단체가 걸어온 길과 행동 등을 일목요연하게 뒤돌아보면 어느 정도의 실체를 알 수 있죠.
소치 올림픽은 9년 전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소트니코바가 아직 논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요. 과연 그가 떳떳한 올림픽 챔피언이었고 러시아 피겨가 '최강국'에 걸맞게 정직한 승부를 겨뤘다면 이런 논란이 반복될 이유가 있었을까요?
문제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소치올림픽 여자 싱글의 결과가 정당하지 못했고 이후 여러 사건이 터지며 명예가 실추됐기 때문이죠.
소트니코바는 최근 공개된 유튜브 채널 'Tatarka FM'과 인터뷰에서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스스로는 결코 논란을 야기할 발언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죠. 정확한 원인은 알 길이 없지만 자국 후배 카밀라 발리예바(17, 러시아)를 감싸기 위해 자신의 경험담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소트니코바는 2014년 자신이 도핑 양성 판정을 받았고 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두 번째 샘플에서는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선수 본인이 도핑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밝히는 일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2011~2012 시즌 소트니코바는 시니어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이후 ISU 그랑프리에 6번 출전했지만 금메달을 따내지 못했습니다. 소치 올림픽이 열린 2013~2014 시즌에는 2개의 그랑프리에서 모두 은메달을 따내며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출전 선수 6명 가운데 5위에 그치며 메달 획득에 실패합니다.
2013년에 열린 시니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9위에 그쳤습니다. 소트니코바가 그나마 선전한 대회는 유럽선수권이었습니다. 2013년과 2014년 대회에서는 모두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피겨 여자 싱글의 에이스는 2014년 유럽선수권대회 챔피언이자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은메달을 따낸 리프니츠카야였죠.
이러한 성적을 볼 때 소트니코바는 분명 소치 올림픽 메달 후보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김연아는 '피겨의 전설' 카타리나 비트(독일) 이후 올림픽 여자 싱글 2연패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당시 유럽 최강자였던 카롤리나 코스트너(36, 이탈리아)와 아사다 마오(33, 일본) 여기에 홈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 메달권에 진입할 것으로 여겨졌던 리프니츠카야의 경쟁이 전망됐습니다.
그러나 막상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이 시작된 뒤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리프니츠카야가 실수로 흔들릴 때 소트니코바는 74.64점을 받으며 김연아(74.92점)에 이어 2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프리스케이팅에서 러시아에는 '영광'이자 올림픽 피겨 역사에는 '흑역사'가 쓰여졌죠. 당시 프리스케이팅에서 클린에 성공한 상위권 선수는 김연아와 코스트너 그리고 아사다 마오였습니다. 그러나 큰 실수를 피했지만 클린 경기에는 실패한 소트니코바가 무려 149.95점을 받으며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당시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 나선 선수 한 명 한 명의 경기를 지금 세세하게 관찰해도 '상식선'에서 벗어난 판정은 분명하게 보입니다.
단순히 김연아 VS 소트니코바의 대결 구도를 넘어 다른 선수들과의 점수 형평성을 놓고 봐도 소트니코바는 홈 텃세는 '역대급'이었습니다. 특히 구성요소 점수에서 소트니코바가 74.41점이나 받은 점은 지금 봐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선수'인 김연아를 제외하고 동메달리스트인 코스트너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텝시퀀스를 비롯한 각종 요소를 한층 풍부하게 해낸 코스트너보다 소트니코바의 PCS가 더 높다는 점은 공정한 판정이 상실된 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소트니코바는 트리플 플립 + 더블 토루프 + 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점프에서 실수가 나왔죠. 실수가 있었음에도 소트니코바의 점수가 그렇게 높을 수 있었던 원인은 비 점프 요소에서 모두 최고 등급인 레벨4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올라운더였던 김연아는 스텝시퀀스에서 레벨3에 그쳤지만 소트니코바는 레벨4를 받았습니다.
결국 소트니코바는 ISU 주관 시니어 대회 우승과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이 없는 '최초'의 여자 싱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에 열린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개인 최고 점수 202.36점보다 무려 22.23점이나 높은 224.59점을 받았습니다. 소치 올림픽 전까지 신채점제 도입 이후 이 정도로 짧은 기간에 점수가 오른 경우도 없었죠.
문제는 올림픽 이후에도 있습니다. 소치 올림픽 편파 판정에 대한 의문이 한국을 제외한 몇몇 국가에서도 나왔지만 소트니코바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떳떳함'을 증명해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2014~2015 시즌은 건너뛰었고 2015년 2개의 챌린저 대회에서 2위와 6위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자국에서 열린 ISU 로스텔레콤 컵에서 동메달을 따냅니다. 이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소트니코바는 점프에서 심하게 흔들렸고 더블 악셀에서는 빙판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PCS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시상대에 섰습니다.
2015년 12월 챌린저 대회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는 6위에 그쳤습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소트니코바는 국제 대회 무대에 서지 못했죠. 2018년 평창 올림픽은 부상을 이유로 불참했고 2020년 3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소트니코바가 걸어온 길을 볼 때 올림픽 금메달은 분명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논란은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꼬리를 물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도핑 파문으로 얼룩진 러시아 피겨, 발리예바에 이어 소트니코바까지 치명타
지난해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발리예바' 파문이 터진 뒤 도핑 검사 등으로 몇몇 전 국가대표 선수 및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의견은 "허탈하다", "러시아의 도핑 의혹은 뿌리가 뽑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핑 검사의 철저함과 러시아 측이 해명하는 주장이 얼마나 명확한 논리에서 어긋나는 지는 선수 출신인 이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발리예바는 도핑 양성 반응이 할아버지의 심장약 치료제 성분이 섞인 탓에 양성 반응이 나왔다고 항변했습니다. 이에 철저한 도핑 테스트를 경험한 한 선수 출신 관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라며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적지 않은 피겨 선수들은 잦은 부상으로 매일 고생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도 도핑 테스트를 위해 진통제나 감기약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도핑위원회 직원 1명, 자원봉사자 1명이 따라다니는 상황에서 테스트를 거칩니다. 이렇듯 대부분 선수들이 마땅하게 지켜야 할 도핑테스트의 '상식선'은 발리예바와 소트니코바의 경우를 보면 여지 없이 무너집니다.
소트니코바는 "첫 번째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2차에서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WADA는 선수의 권리 보호를 고려해 도핑 검사 샘플을 2개 만듭니다. 문제는 한 번에 채취한, 그리고 동일한 선수의 몸에서 채취한다는 점이죠. 결국 1차 과정에서 똑같은 샘플을 2개로 나누는 단순한 공식입니다.
그런데 1차에서는 양성이 나왔는데 2차에서 음성이 됐다는 경우는 다시 한번 '상식선'을 넘습니다.
실제로 WADA는 2016년 러시아의 조직적 도핑 실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 도핑 샘플 명단 자료에서 소트니코바의 소변 샘플이 훼손됐던 걸로 알려져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소트니코바는 자기 입으로 "도핑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 그런데 두 번째 검사 결과에서는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실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7일 "WADA는 IOC에 소트니코바가 한 발언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고 전했습니다. 러시아는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도핑 스캔들로 2018년 평창 올림픽과 2021년에 열린 도쿄 올림픽에서 '러시아'라는 국가로 출전이 금지됐습니다.
그리고 '피겨 최강국'이라는 자부심도 '발리예바 파문'으로 명예를 잃었죠.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ISU에 징계를 받아 지난해부터 대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여기에 소트니코바의 발언까지 터졌습니다.
ISU는 차기 이사회에서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의 빙상 종목(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피겨 스케이팅) 국제 대회 복귀 여부를 다시 논의합니다.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러시아 피겨 선수들은 '언젠가는' 빙판에 돌아옵니다. 다시 한번 세계 피겨의 경쟁 구도는 뒤바뀌고 한국 선수들의 국제 대회 메달 장벽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흐지부지하게 넘어간 러시아 도핑에 대한 문제가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는 점이죠. 또한 모든 선수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식'에 동참해야 합니다.
석연찮은 편파 판정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점, WADA가 발표한 도핑 샘플 명단 자료에서 그의 소변 샘플이 훼손되면서 논란을 야기한 점, 여기에 스스로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결국은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고 이 인터뷰 영상은 사라졌다는 점 등을 볼 때 소트니코바는 다시는 나오면 안 될 올림픽 챔피언으로 남을 듯 합니다.
ISU가 러시아 선수들의 국제 대회 복귀를 논의하는 차기 이사회는 오는 10월에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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