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별천지]⑧ '격전지에서 희망의 땅으로'…양구 펀치볼

이해용 2023. 7.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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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 전 6·25전쟁 거치며 얻은 별칭으로 세상에 더 알려져
목숨 걸고 개간한 황무지, 명품 꿀사과 주산지 도약…수출까지
펀치볼과 지뢰 표지판. [촬영 이해용]

[※ 편집자 주 =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의 발걸음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듭니다. 강원도의 산과 강, 바다와 호수를 따라 굽이치는 길 끝에는 반짝이는 주민들의 삶이 모여 있습니다.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소멸이라는 화두와 함께 잦아들고 있지만,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어갑니다. 길과 마을에 깃든 27개의 이야기를 연합뉴스가 1년 동안 격주로 소개합니다.]

(양구=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 중동부 전선 비무장지대(DMZ) 아래에 자리 잡은 강원 양구군 해안면은 남북 7㎞, 동서 3.5㎞ 규모의 분지다.

이곳은 1천m 높이의 대암산, 도솔산, 대우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의 마을은 해발 400m로 낮아 마치 대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노천 운동장을 연상케 한다.

해안분지는 6·25전쟁 기간 외국 종군기자가 움푹 팬 지형을 보고 '화채 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펀치볼'로 부르면서 새로운 별칭을 얻었다.

이 별칭은 올해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년이 됐지만 지금까지도 이곳을 부르는 지구촌의 대명사로 통한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작전지도에 표기된 펀치볼(파란색 동그라미). [촬영 이해용]

'해안가 아니네'…돼지 해(亥)·편안할 안(安)자 쓰는 육지 마을

해안면은 차별침식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침식 분지다.

하늘에서 보면 무엇인가에 부딪치면서 움푹 팬 지형처럼 보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주변의 산지에서 흘러내린 빗물과 강물에 의해 깎여 나가면서 탄생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이 고장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할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해안면 만대리에 있는 선사유적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양구 해안면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인 이곳이 해안가에 자리 잡은 마을이 아닌가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해안면은 예로부터 뱀이 많아 주민들이 돌아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때 어느 스님이 돼지를 키우라고 알려줬고, 돼지들이 뱀을 잡아먹으면서 주민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됐다.

해안면이라는 지명으로 돼지해(亥) 자와 편안할 안(安)자를 쓰게 된 데는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날의 격전지에서 모습을 드러낸 어느 군인의 유해. [촬영 이해용]

민족상잔의 전쟁…주민은 남북으로 흩어지고, 문전옥답은 황무지로

평화로웠던 이 고장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격전의 현장으로 돌변했다.

남북이 뺏고 뺏기는 전투를 거듭하는 동안 주민들은 북으로, 남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은 불발탄이 널린 황무지로 변했다.

치열했던 전투 끝에 1953년 7월 포성은 멈췄지만, 국민이 먹고 살 농토가 부족해지자 정부는 방치된 휴전선 지역에 민간인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꺼내 들었다.

해안면 개척의 역사는 1956년 4월 육군 6사단 장병들이 첫 입주민 160가구를 군부대 트럭으로 옮겨 허허벌판에 내려놓는 것으로 시작됐다.

입주민들은 미군들이 전쟁 기간 버렸던 수저와 군용 그릇을 식기로 사용하며 황무지에 벼를 심었고, 야산에 불을 놓은 뒤 고구마와 감자, 콩을 심는 화전 농사를 시작했다.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정규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힘들다고 판단해 휴전선 인근 마을을 요새화하기로 하고, 해안면 만대리 일대 황무지를 불도저로 밀어 1970년 100가구를 더 입주시켰다.

입주 희망자들이 사전 답사를 한 결과 지나치게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30가구가 포기하자 다시 인근 주민을 데려왔으나 입주식 날에도 포기하는 가구가 나올 정도로 초기 거주 환경은 열악했다.

생활하는데 가장 불편했던 것은 출입 문제였는데 해가 지면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불빛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등화관제를 해야 하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민통선 밖으로 외출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펀치볼 지뢰 피해자. [촬영 이해용]

전쟁 후 버려졌던 들판을 개간하는 일은 목숨과 맞바꾸는 작업이었다.

입주민들은 풀뿌리로 배를 채우고 야전삽으로 버드나무를 파헤치며 맨손으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전쟁터를 농경지로 바꾸는 과정에서 폭발 사고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펀치볼에서는 주민 수십명이 지뢰 사고로 숨지거나 다쳤다.

지뢰 사고는 가정을 파탄 냈고, 가장이 목숨을 잃은 집안의 자녀들은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가난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군부 통치 시절 지뢰 사고를 당하고도 쫓겨날까 봐 쉬쉬해야 했던 이 지역의 피해 현황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외부에 알려졌다.

해안면은 남북분단 이후 수십 년 동안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으로 묶이는 바람에 엄격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불편했던 민통선 출입 문제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육군 소위로 해안면 만대리 산기슭의 목조 벙커에서 근무를 시작해 민통선 지역의 불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주민들은 추측했다.

매년 교체해야 했던 주민들의 민통선 출입증도 이때부터 폐지됐다.

용늪에 서식하는 각종 생물들. [촬영 이해용]

생명의 보고로 바뀐 전쟁터…국내 유일의 고층 습원·열목어 서식지까지

6·25전쟁 기간 하루에도 몇번씩 주인이 바뀌었던 격전의 현장은 분단 70년 세월 다시 생명이 찾아들었다.

펀치볼을 둘러싼 산 중의 하나인 대암산 용늪은 람사르협약 국내 1호 습지이자 국내 유일의 고층습원이다.

4천∼4천500년 전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암산 용늪은 식물 343종, 동물 303종이 서식하며 다양한 희귀종이 자생하는 등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생태자원의 보고로 평가된다.

불발탄이나 지뢰 유실이 우려되는 하천은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됐다.

민통선 지역 생태계 조사 결과 해안면의 하천에서는 남한에서 매우 드물게 새미가 다수 서식하고, 펀치볼의 하천이 합류하는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최상류 지역은 열목어, 어름치, 가는돌고기 등 희귀종의 서식지임이 확인됐다.

펀치볼 인근 수입천 상류와 두타연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 열목어 서식지라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주변의 기암절벽에서는 천연기념물인 산양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남북 긴장감 고조될 때 긴급 배치된 군부대 장비. [촬영 이해용]

기후 온난화 덕분…명품 사과 재배지로 급부상

중무장한 남북의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휴전선 아랫마을인 펀치볼은 최근 명품 사과 주산지로 부상했다.

기후 온난화로 경북 등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고, 도시인들도 귀농해 사과나무를 심으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펀치볼 지역은 기후가 서늘하고 일교차가 커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하며 보관성이 좋아 사과를 재배하는 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양구군이 '북위 38도 사과 명품화사업' 등을 통해 사과 주산지로 도약하는 데 필요한 저온저장고와 선별시스템 등을 지원한 결과 2015 대한민국 과일 산업 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홍콩과 러시아 등 해외시장까지 진출했다.

올해 현재 펀치볼에서는 118 농가가 축구장 면적(0.714㏊)의 327배에 해당하는 234㏊ 규모의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최근에는 인삼을 심었던 곳에다 사과를 심는 추세여서 재배 면적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오는 27일로 6·25전쟁 정전 70년을 맞는 펀치볼에서 알알이 익어가는 사과는 오는 9월부터 출하된다.

양구군 관계자는 "지구 온난화로 양구가 과수 재배 최적지로 부상하고 있다"며 "대한민국 명품 사과 주산지로 자리매김하고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름비 맞으며 자라는 양구 사과. [촬영 양지웅]

dmz@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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