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人] ⑬"식량난에 모친·아기 잃어…24년전 中 팔려간 여동생 찾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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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부천의 북한 이주주민 협의회인 한마음회 최복화(46) 회장은 생계형 밀거래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온 사이 한 살배기 아기가 굶어 죽은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4년째 한마음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최 회장은 "최근 창업한 젊은 탈북민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창업 후 한동안 경영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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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연합뉴스) 최현석 기자 =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부천의 북한 이주주민 협의회인 한마음회 최복화(46) 회장은 생계형 밀거래 때문에 감옥에 갔다 온 사이 한 살배기 아기가 굶어 죽은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지난달 27일 부천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앞서 식량난에 친정어머니도 잃었다"며 "24년 전 중국으로 팔려 간 여동생이라도 꼭 찾고 싶다"고 토로했다.
4년째 한마음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최 회장은 "최근 창업한 젊은 탈북민이 빚 독촉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창업 후 한동안 경영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문답.
-- 북한에서 생활은 어땠나.
▲ 1977년 4월 세계적 철광석 광산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3차례 남파됐다가 지뢰 사고로 다친 '영예군인'(상이군인) 출신이고 어머니는 독립유공자인 외할아버지 덕에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노동당원이었다.
-- 출신성분 때문에 혜택을 받았나.
▲ 아버지는 러시아 벌목중대장으로 선발돼 1986년부터 일했다. 첫 3년간은 월급의 80%를 국가에 바치고도 TV나 삼면경대 같은 제품을 많이 가져오셨다. 그런데 1991년 귀국했을 때는 머리를 다쳐 치료비로 탕진하고 정신질환까지 앓으셨다. 당국에서 치료비도 지원해주지 않고 '49호 병원'(정신병원)에선 음식을 못 준다며 강제 퇴원시켰다. 방랑하던 아버지는 1996년 8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 생계는 어떻게 꾸렸나.
▲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6년 고교 졸업 후 대홍단 감자 장사 등을 했다. 돈을 벌어 당시 유행하던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 까치신발을 샀다. 그런데 이걸 낭비라며 나무라는 오빠와 다툰 뒤 가출했다. 한 달 보름 정도 후에 집에 들어갔더니 지병이 있던 어머니가 제대로 먹지도 못해 돌아가셨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한이 맺힐 것 같다. 1999년 가을에는 대흥단장사를 같이하던 21살 여동생이 사촌 언니 말에 속아 중국에 팔려 갔는데 아직도 못 찾고 있다.
-- 장사는 언제까지 했나.
▲ 2001년 시골 남성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다. 오빠와 남동생도 같이 데려가서 농사짓고 살았는데 시댁 눈치가 보여 밀거래를 시작했다. 장마당에서 토종개를 사서 중국에 넘기고 TV와 녹음기 등을 받아 와 브로커에게 판매했다. 그러다가 아기 돌을 한 달 앞둔 2002년 5월 말 국경경비대에 잡혔다. 다 실토하면 용서해준다는 말에 넘어가 밀수 사실을 진술서에 10장 넘게 빼곡히 썼다. 그런데 3년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 교도소 생활은 어땠나.
▲ 무산 구류장에서 4개월을 지냈다. 앉아있지 않거나 부스럭 소리라도 내면 철창에 매달리도록 했다. 남한에 가려다 체포된 탈북자들은 무기한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는데 죽도록 맞거나 고문당한다고 들었다. 10월 초 함흥교도소에 수감됐다. 굶어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설사병으로 죽은 사람도 봤다. 며칠에 한 번씩 개울에 가서 목욕하면 남성 고위 안전원들이 위에서 지켜봤다.
-- 출소 후 가족과 재회했나
▲ 죽기 살기로 나무하고 모범적으로 생활해 2003년 8월 조국해방전쟁 승리 50주년 특사로 조기 석방됐다. 집에 가니 딸이 6개월 전 설사병으로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수감 전 시누이가 나한테 살아서 못 나올 거라며 딸을 입양시키겠다고 했을 때 거세게 반발했던 게 가슴을 후벼팠다.
-- 그해 탈북했나.
▲ 시댁에서 남편을 못 만나게 하고 친척들도 불이익을 당할까 봐 나를 멀리했다. 오빠와 남동생이 중국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9월 17일 두만강을 건넜다. -- 중국 생활은 어땠나.
▲ 중국의 '대방'(무역업자) 소개로 헤이룽장(黑龍江)성 무링(穆楞)시의 한족 남성과 결혼한 뒤 2004년 12월 딸을 출산했다. 상하이(上海)에 있던 오빠가 연락했는데 한족 가족이 연결을 안 해줬다. 2006년 상하이로 도망가서 미용실 청소와 간병인을 하다가 5년 반 동안 한국 식당에서 일했다.
-- 왜 한국행을 결정했나.
▲ 남동생이 한국에 간 것을 뒤늦게 알게 돼 1년간 고민 끝에 2011년 11월 오빠와 동반 입국했다. 2013년 탈북 남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2014년 9월 중국에 가서 딸도 데려왔다. 이후 식당 일해서 모은 돈으로 2017년 9월 북한 음식점을 개업했는데 6개월 만에 접었다.
-- 한마음회에는 어떻게 가입했나.
▲ 가게를 접고 집에만 있으면 병이 생길 것 같아 신규 탈북민을 지원하는 한마음회에서 어르신들 봉사 활동을 했다. 고생했다며 손잡아주는 어르신들 덕에 내가 더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2021년부터 회장을 맡았으며 회원은 50여명이다.
-- 향후 계획은.
▲ 봉사 활동을 계기로 부천대 평생교육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일주일에 3일은 학교에 다니고 3일은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통일되면 북한에서 사회복지 일을 하고 싶다. '고난의 행군' 때 북한 지역당 한 개의 무료급식소만 있었다면 3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도 되려는 마음에 온라인으로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2012년 탈북자 문예창작 공모에서 경기도지사상을 타기도 했다.
-- 탈북민 정착에 필요한 정책은.
▲ 며칠 전 북한 음식인 두부밥을 도시락으로 만들어 배달하는 사업을 했던 젊은 탈북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창업 후 수익을 못내 빚 독촉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도 음식점 사업을 재개하려고 했을 때 자금난 때문에 한 달을 버티기가 어려웠다. 탈북민 지원 펀드가 창업 후 얼마 동안은 계속 컨설팅해주면 좋겠다.
harris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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